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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순

鄭敬珣

1899. 5. 22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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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정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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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의주(義州)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북도 의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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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대한독립단

포상 정보

  • · 애국장(2016)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16) 1899년 5월 22일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수진면(水鎭面) 수구리(水口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다른 한자의 정경순(鄭敬詢·鄭敬淳·鄭慶淳)과 정벽파(鄭碧波)이다. 만주 지역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였다. 만주 지린성(吉林省)의 옌지현(延吉縣)·화룽현(和龍縣)·왕칭현(汪淸縣)·훈춘현(琿春縣) 지역은 대한제국 말기부터 한인이 이주해 정착했던 곳이다. 경술국치 이후 만주 지역에는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의병부대들이 대거 이주하였고, 이들을 기반으로 한 보약사(保約社)·향약계(鄕約契)·농무계(農務契)·포수단(砲手團) 등 한인 조직이 건설되었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같은 해 4월 15일 지린성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서구(西溝) 대화사(大花斜)에서 유림 및 의병계열 독립운동가 560여 명이 모여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조직하였다. 대한독립단은 복벽주의(復辟主義)를 표방하였으며, 도총재(都總裁)와 총단(總團)을 두었고, 중앙본부와 지방지부를 나누어 서간도 지역 9개 현에 지단(支團)을 조직하였다. 또한 군사 조직으로 지린성 무송현(撫松縣)에 본부를 두고 4개 중대로 구성된 남만주제일사단(南滿洲第一師團)을 두었다. 대한독립단 설립 당시 도총재는 박장호(朴長浩), 부총재(副總裁)는 백삼규(白三圭), 총단장은 조맹선(趙孟善), 남만주제일사단 본부단총(本部團總)은 김창묵(金昌默), 본부대장(本部隊長)은 방사익(方士益)이 담당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한학을 배운 유학자들이었고, 의암(毅庵) 유인석(柳麟錫)의 문인들이 많았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대한독립단은 공화주의를 표방한 임시정부의 지지 여부에 따라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민국파 독립단과, 복벽주의를 주창하고 단기를 연호로 삼는 기원파 독립단으로 분리되었다. 민국파 독립단은 이후 1920년 8월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사령부에 통합되었고, 기원독립단은 독립적인 조직을 유지하였다. 나아가 대한독립단은 1919년 8월과 1920년 1월 두 차례에 걸쳐 국내에도 지단을 설치하기 위해 특파원을 파견하여 평안도·황해도 등지에 80여 개의 지단을 설치하였고, 국내의 인사들과 연합하여 단원 확보 및 군자금 모집에 나섰다. 이때 1920년 1월 만주 펑톈성(奉天省) 지안현(輯安縣) 대한독립단원 김유성(金有聲)의 권유로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였다. 그 해 9월 21일 김상율(金尙律)의 지휘 아래 김일록(金日綠) 외 3명과 더불어 평북 의주군 송장면(松長面) 송산동(松山洞)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이후 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설정하고, 같은 해 7월 26일과 8월 1일 군무부(軍務部) 직할 서간도 지방사령부로 대한광복군사령부(大韓光復軍司令部)를 결성하였다. 이에 앞서 지린성 안동현에서는 7월 이후 대한광복군총영(大韓光復軍摠營)이 조직되었는데, 이 대한광복군총영은 대한광복군사령부의 실질적인 지방사령부 역할을 담당하였다. 여기에 대한독립단은 1920년부터 대한광복군사령부에 편제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1922년 6월 3일 김덕산(金德山)의 지휘 아래 오병선(吳炳善) 외 5명과 더불어 평북 초산군(楚山郡) 서면(西面) 무학동(舞鶴洞)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한편 1922년 봄 지린성 환런현(桓仁縣)에서 열린 남만한족통일회(南滿韓族統一會)에서 남만주의 독립군단들 중 대한독립단을 비롯하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광한단(光韓團)·한교민단(韓僑民團)·평북독판부(平北督辦部)·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 등 대표자들이 모여 각 조직을 통합한 형태의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 8월 23일 8단 9회의 대표자 71명은 환런현 마권자(馬圈子)에서 남만한족통일회의(南滿韓族統一會議)를 재차 개최하였는데, 이때 환런현 소협피구(小夾皮構)에 거주하면서, 이웅해(李雄海)·이영식(李永植)·최석순(崔碩淳)·전창희(田昌禧) 등과 함께 대한독립단 대표로 참가하였다. 이 회의에서 다시 한 번 각 독립군 조직을 완전히 통합할 것을 확약하고, 남만한족통일기관의 이름을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로 결정하였으며, 1922년 8월 30일 남만한족통일회 회장 김승만(金承萬)이 통합조직을 공식 선포하였다. 통의부는 군사 활동과 교민의 자치행정을 겸임하는 조직으로, 일종의 군정부(軍政府)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민사·교섭·군사·재무·학무·법무·참모·교통·실업 등 9개 행정부서를 두었으며, 의용군(義勇軍)이라는 이름의 군대를 보유하였다. 이때 대한통의부 의용군 제2중대로 편제되었으며, 1923년 1월 3일 이칠성(李七星)과 더불어 평북 초산군 앙토동(央土洞)과 초산군 서면 용상동(龍上洞) 등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고, 같은 해 6월 28일 초산군 서면 무학동과 중은촌(中殷村)에서의 양차 전투에서 일제 경찰 4명을 처단하였다. 한편 통의부 내 공화주의와 복벽주의 간의 이념 갈등과 군권 장악을 둘러싼 문제들은 해결되지 못하였고, 결국 1923년 2월 복벽계는 환런현 대황구(大荒溝)에서 통의부의 탈퇴를 선언하고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를 새로 결성하였다. 이에 1924년 4월과 6월에 걸쳐 통의부 의용군 제1·2·3·5중대, 유격대·독립소대는 상하이의 임시정부와의 제휴를 꾀하여 통의부를 탈퇴하였다. 이들은 그해 6월 26일 지린성 지안현·푸쑹현·안투현(安圖縣)·퉁화현(通化縣)·창바이현(長白縣)·류허현 등 압록강 연안 지역을 관할하는 임시정부 군무부(軍務部) 직속의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 이하 참의부)를 결성하였다. 이때 참의부 부사(副司)로 활동하였다. 이후 일제 경찰에 붙잡혀, 1928년 11월 7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강도죄,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10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1934년 11월 16일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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