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정봉조

鄭鳳朝

1894. 11. 19 ~ 미상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정봉조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함남 갑산(甲山)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남도 갑산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흥업단
  • · 국민단
  • · 광정단

포상 정보

  • · 애국장(2012)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12) 1894년 11월 19일 함경남도 갑산군(甲山郡) 장평면(長平面) 억년리(億年里)에서 태어났다. 집안 배경 및 성장 과정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는 없다.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였다. 만주 펑톈성(奉天省) 창바이현(長白縣)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함남 혜산(惠山)과 삼수(三水)·갑산에 인접해있으며,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많은 한인들이 이 곳으로 이주하였다. 1915년 기준으로 장백현에 살았던 한인 가구의 수는 3,785호였다. 또한 한인들은 이 곳에서 정몽학교(正蒙學校)·태흥학교(太興學校, 이후 관화학교(官話學校)) 등을 세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교육을 시행하였다. 나아가 한국의 독립을 위한 한인단체로 1913년 10월 20일 한교동사회(韓僑董事會)가 조직되었다. 1919년 3월부터 국내에서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그 영향으로 장백현에도 독립운동 조직이 생겨났다. 한교동사회의 조직기반을 근거로 그 해에 이희삼(李熙三)·이동백(李東白) 등에 의해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이 결성되었고, 단장으로 이은경(李殷卿)이 선임되었다. 대한독립군비단의 주요 활동은 국내와 만주를 연결하여 독립군 활동에 필요한 군자금을 모집하는 일이었으며, 9월에 열린 책임자 대회를 통해 민주공화국 수립을 군비단의 최종 목표로 규정하였다. 설립 당시 300명 정도의 단원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후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이태걸(李泰杰)·김정익(金鼎益) 등 7명을 파견하여 군비단의 약장 및 지단규칙을 발표하고, 군비단을 임시정부의 명령계통에 포섭하였다. 임원들 중 대부분은 함남 출신이었으며, 특히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였던 이동휘(李東輝)의 고향인 함남 단천군(端川郡) 출신이 많았다. 이 시기에 1918년 4월 1일부터 함남 갑산군 헌병분대 양류리(楊柳里) 주재소에서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하였다. 그 해 7월경 만주 펑톈성 푸쑹현(撫松縣)으로 망명하여 친척인 정기욱(鄭基郁)의 집에 기탁하여 농업에 종사하였다. 한편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난 후 푸쑹현에 흥업단(興業團)이 조직되었다. 흥업단은 지린성(吉林省) 허룽현(和龍縣)에 있던 대종교 총본사 및 지린성 왕칭현(汪淸縣) 소재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와 긴밀히 연계하여 활동한 독립운동단체이다. 간부들 중 대다수는 대종교인이었으며, 흥업단 연무소에서는 북로군정서의 파견원이 독립군의 양성을 담당하였다. 흥업단의 단장은 김호(金虎), 부단장은 김혁(金赫), 총무는 윤세복(尹世復)이 담당하였다. 1919년 (음)10월 푸쑹현에서 흥업단 단원에게 일제의 밀정으로 오인되었으나, 정기욱의 아들 정순조(鄭順朝)의 비호로 누명을 벗은 후, 그의 권유로 흥업단에 가입하였다. 주비부장(籌備部長) 이재풍(李在豊)과 함께 주비부원으로 활약하며, 린장현(臨江縣) 일대에서 독립자금을 모집하였다. 이후 1921년 6월 1일 대한독립군비단이 머물러 있던 장백현 16도구(道溝)에서 군비단·흥업단 등의 독립운동 단체 대표 20명이 연합회를 개최하였고, 이 때 함남 갑산 출신 흥업단 지단장인 김창일(金昌一)이 임시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나아가 기존 단체들을 통합하여 300명 이상의 무장단체 조직을 결성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후 흥업단을 기반으로 1921년 10월 14일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이 새로 발족하였으며, 회장으로 김호가 취임하였다. 국민단은 이후 임시정부의 산하 기관으로 거듭났다. 이 때에 이르러 장백현 16도구 서덕수(西德水)에 거주하면서, 국민단의 군사부원(軍事部員)으로 활동하였다. 이어서 1922년 4월 장백현에서 활동하던 대한독립군비단·국민단·대진단(大震團)·태극단(太極團)·광복단(光復團) 등 5개 단체가 연합하여 대한독립광정단(大韓獨立光正團, 이하 광정단)이 발족하였다. 단장에는 국민단의 김호가 취임하였고, 총무에는 군비단 단장을 역임한 윤덕보(尹德甫)가, 군무장 강진건(姜鎭乾), 재무장 김관용(金寬用), 비서장 장승언(張承彦)이 선임되었으며, 본부를 장백현 17도구에 두었다. 이후 1923년 초 광정단은 본부를 지린성 무송현(撫松縣)으로 옮겼고, 1923년 6월에는 조직 개편을 단행하였다. 이 때 단장 윤덕보, 부단장 김호, 비서 김성진(金聲振), 재무부장 김국태(金國泰), 서무부장 장승언, 경호부장 정철명(鄭哲明), 군사부장 이한평(李漢平), 군법과장 김용대(金容大), 문화부장 한성일(韓性一), 산업부장 최진용(崔鎭鏞)이 취임하였다. 1924년 초 광정단은 단장 체제에서 위원장 체제로 조직을 개편하였고, 위원장에 윤덕보를 선임하였다. 이후 1924년 7월 만주 지린성에서 열린 전만주통일회의주비회(全滿洲統一會議籌備會)가 개최됨에 따라, 광정단을 비롯하여 창조파 계열의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의성단(義成團), 군정서(軍政署), 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 변윤자치회(卞倫自治會), 노동친목회(勞動親睦會), 고본계(固本契) 등 8개 조직이 통합, 1924년 11월 24일 만주 지린성(吉林省) 화전현(樺甸縣)에서 정의부(正義府)가 조직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1922년 6월 경 군사부장(軍事部長) 강진건의 휘하에서 군사부 차장(次長)으로 활동하였고, 폭탄 14개, 장총 40자루, 권총 몇 정, 폭약 2,000발을 보관하였다. 그 해 9월 25일 광정단원 40명이 함남 삼수군(三水郡) 영성주재소(嶺城駐在所)를 습격할 당시 단원들에게 장총 35자루, 권총 5개, 폭탄 6개를 교부하였으며, 이 때 일제 경찰 한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세우는 한편 동 지역의 김경조(金瓊祚)에게서 현금 50원의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이후 강진건이 붙잡히자 군사부장 대리로 임명되었다. 1923년 (음)3월경 경호부장으로 임명되어 6월 16일부터 19일까지 일제 밀정으로 의심되는 장백현 제2정몽학교 교사 김철(金哲)을 조사하였다. 이후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23년 10월 22일, 나이 30세 때 청진지방법원에서 징역 15년을 받고 항소하였다. 1924년 3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5년이 감형되어 징역 10년을 받았다. 이후 상고하였으나, 1924년 5월 22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되어 형이 확정,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고 1933년 3월 18일 출소하였다.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대현⋮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