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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昌孫

昌孫

1888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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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昌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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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충주(忠州)의병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북도 충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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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정낙인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15) 충청북도 충주군(忠州郡) 덕산면(德山面) 용암리(龍岩里)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888년생으로 추정된다. 집안 및 성장과정을 알려진 바 없으며, 자라서 농업에 종사한 것만 확인된다. 정낙인(鄭樂寅)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의병활동을 하였다. 1907년 헤이그특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이 퇴위되고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전국에서 정미의병(丁未義兵)이 봉기하였다. 의병장 정낙인은 정봉준(鄭鳳俊) 의병부대와 연대하여 원주(原州) 일대에서 400~500명의 의병들을 지휘하여 항일 무장 투쟁을 벌였다. 1908년 4월 25일((음) 3월 25일)에 정낙인 부대에 합류하여 등짐을 지고 의병들의 물자를 운반하다가 충북 청풍(淸風) 앙동(仰洞)에서 일본군과 조우하여 벌어진 전투에서 왼쪽 다리에 총탄을 맞았다. 풀숲에 쓰러져 있어 일본군의 체포를 면하였다가 부근을 지나던 나뭇꾼에게 구조되어 귀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의병 활동에 관한 정보가 일제 경찰에 입수되어 충주 헌병분견소에 결국 붙잡혔다. 1908년 8월 24일 공주구검사국(公州區檢事局)에서 검사의 조사를 받았고, 1908년 9월 2일 공주구재판소에서 이른바 ‘폭도수종(暴徒隨從)’죄로 태(笞) 100 도(度)를 받았다.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여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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