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士有
士有1879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이홍일 의병부대
- · 이기협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족장(1995)
관련 사건
- · 후기의병(이홍일 의병부대
- · 이기협 의병부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5) 전라북도 여산군(礪山郡) 공촌면(公村面, 현 충남 논산시 연무읍) 봉동(鳳洞)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908년 당시 29세이므로 1879년생으로 추정된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07년 이홍일 의병부대와 이기협 의병부대에 차례로 들어가 군자금 모집 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1907년 헤이그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이 강제로 퇴위되고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당하자, 전국에서 다시 의병이 일어났다. 1907년 11월 20일경 이홍일(李洪一)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항일투쟁을 시작하였다. 이어 같은 해 12월 초 이기협(李基浹) 의병부대에 다시 들어가 전북 여산군·함열군(咸悅郡)·용안군(龍安郡)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먼저 의병부대에 들어간 그날 밤부터 이기협의 지휘 아래 동료들과 함께 함열군 제석리(帝石里)에 사는 김감찰(金監察)로부터 군자금으로 170냥을 징수하였다. 다음날에도 오후 5시 함열군 내완동에 사는 유화삼(柳化三)으로부터 60냥을 모집하였다. 1908년 (음)6월 15일 무렵 이기협 의병장의 부하인 박덕겸(朴德兼)과 한만보(韓萬甫)로부터 사용하던 화승총 4정과 환도 1자루 등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고 보관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08년 9월 30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항소하였다. 1심을 거쳐 1908년 10월 31일 대구공소원에서 이른바 내란죄로 유형(流刑) 10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며 다시 상고하였고, 그해 11월 27일 대심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다시 대구공소원으로 환송되었다. 같은 해 12월 16일 대구공소원에서 다시 유형 10년을 받았다. 재차 상고하였지만, 1909년 1월 21일 대심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노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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