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수
鄭東秀1904. 10. 22 ~ 1991. 10. 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성진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광주학생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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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904년 10월 22일 전라남도 담양군(潭陽郡) 남면(南面) 외동리(外東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군농회(郡農會) 기술직으로 일한 바 있으며, 활동 당시에는 담양군 무면(武面) 반룡리(盤龍里)에 거주하였다. 1926년 광주농업학교(光州農業學校)에 재학하면서 성진회(醒進會)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성진회는 광주고등보통학교(光州高等普通學校)와 광주농업학교 학생들 중심으로 조직된 비밀결사이다. 조직 과정에서 장재성(張載性)·왕재일(王在一)·박인생(朴仁生)·임주홍(林周弘)·정우채(鄭瑀采)·안종익(安鍾翊)·김광용(金匡溶)·채영석(蔡泳錫)·정남균(鄭南均)·김한필(金漢苾)·정종석(鄭鍾奭) 등과 여러 차례 회합하였다. 성진회의 명칭은 왕재일의 제안에 따라 정한 것이었다. 성진회는 강령으로 첫째 일본제국을 타파하고 한국의 독립을 쟁취할 것, 둘째 일제의 식민지 노예교육을 절대적으로 반대할 것, 셋째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요구할 것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회원들과 함께 당시 지식인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던 사회주의 사상에도 관심을 가졌다. 사회주의에 관심을 표명한 것은 독립운동의 수단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성진회 간부직을 맡지는 않았지만, 매월 첫 번째와 세 번째 주에 개최되었던 정기 모임에 참석하며 독립운동 방략과 민족의식을 고취해 갔다. 1927년 3월 정남균의 집에서 집회를 가졌는데, 그 자리에서 비밀결사인 성진회를 표면적으로 해체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그 이유는 성진회 회원 가운데 한 명이 광주경찰서 형사와 친척인 사람이 있어, 성진회의 실체가 누출되어 독립운동이 좌절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성진회의 비밀보장을 위해 연합집회는 열지 않았지만, 학생운동의 지도자급 인물들을 중심으로 모였다. 신간회(新幹會) 광주지회 장석천(張錫天)과 광주지방 학생운동 중심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지용수(池龍洙)가 성진회 회원 김인수(金仁守)·주당석(朱唐錫)·유치오(兪致五) 등과 회집하였던 것이다. 1927년 11월 김태호(金台鎬)의 집에서 김복만(金萬福)·김재룡(金在龍)·유상걸(柳上杰)·유치오·문승수 등과 모여 일본의 야만적인 통치를 타파하고 한국의 독립을 위한 방편으로 사회주의 사상과 운동 방법을 연구하기로 결의하였다. 1928년 6월에는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 김몽길(金夢吉)·김시성(金時成)·최규창과 광주농업학교 학생 김복근(金福根)·주당석·유치오 등이 주도한 동맹휴교에 참여하였다. 일제의 한인 노예화 교육을 반대하는 동맹휴교였다. 이러한 성진회 회원으로서의 활동과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열의는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 참가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30년 10월 18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받았다. 자신의 행동이 불법적인 것이 아니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 정당한 행동이었다는 판단 하에 항소하였으나, 1931년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이 확정되었다. 미결로 구금된 일수가 형기에 반영되면서 대구형무소에서 바로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박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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