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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타관

全他官

1912 ~ 1935.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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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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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정평농민조합재건위원회

포상 정보

  • · 애족장(2017)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7) 기록에 따르면 1912년생으로 추정된다. 자료의 한계로 출신지는 알 수 없다. 1932년 6월 함경남도 정평군(定平郡)의 정평농민조합(定平農民組合)을 재건하기 위한 비밀결사 정평농민조합재건위원회(定平農民組合再建委員會) 결성에 참여하여 조합원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대 말부터 세계경제 대공황으로 서구와 일본뿐만 아니라 식민지 한국의 노동자들의 경제적 상황이 점차 최악으로 치달았다. 이러한 세계 대공황 시기 노동자의 임금 인하와 해고 등에 대항하기 위한 1930년대 한국의 노동운동을 주도한 것은 노동조합운동을 기반으로 한 파업과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 함경남도 지방은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까지 20년대 노동운동사상 최대 규모의 조직적 투쟁인 원산총파업(元山總罷業)을 대표로 하는 노동조합 및 파업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30년 6월 8일 함경남도 정평군의 정평농민동맹(定平農民同盟) 간부 원회극(元會極)·김장렬(金章烈)·김홍식(金弘植)·이동선(李同善)·한봉적(韓鳳適) 등과 함께 서면대회(書面大會)의 방식으로 전기농민동맹을 해소한 후 정평농민조합이란 합법단체로 개조하였다. 면단위로 부내면(府內面)·장원면(長原面)·문산면(文山面)·춘류면(春柳面)·광덕면(廣德面)·선덕면(宣德面)·귀림면(歸林面)·주이면(朱伊面) 등 각 면에 지부를 두었으며, 행동강령으로 “소작료 감면, 소작권 강제이동 반대, 노동자·농민 운동 탄압법령 철폐, 관료배 직권남용 감시, 농회 자주화, 묘목 강제배분·부당부과 반대, 농민단체 강화, 노동자계급과의 동맹” 등 26개 항목을 내걸고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1930~1931년에 일제 경찰에게 6차례에 걸쳐 150여 명의 동지들이 붙잡혀 함흥검사국에 송국하게 된 정평농민조합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정평의 공산주의 조합운동은 침체를 면치 못하고 있었는데, 이를 타개하기 위해 1932년 6월 중순경부터 잠행적으로 활동하던 한영구(韓永久)·한승겸(韓承謙)·전정현(全正鉉)·이재필(李在弼) 등이 ‘순전적 통제 지도관’으로서의 정평농조재건위원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조합원 획득과 의식 주입 활동을 전개하였다. 전 군내 각 면에서 여성 120여 명을 포합하여 847명을 조합원으로 가입시키고, 9개의 부서를 두고 출판부에서는 『재건뉴스』, 『빈농』 등의 기관지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이때 여기에 가입하고 조합원으로 활동하였다. 다시 정평군을 중심으로 지하에서 노동조합의 재건과 공산주의화 및 노동운동의 활성화를 도모하였지만, 이른바 ‘정평농조재건위원회 사건’을 구실로 일제 경찰에게 관계자 65명과 함께 붙잡혔다. 1934년 12월 28일 함흥검사국에 송부되었다가, 1935년 1월 5일부터 함흥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되어 10개월 만인 10월 31일 예심이 종결되었다. 64명 전원이 이른바 치안유지법과 출판법 위반, 상해죄, 폭력행위죄 등으로 함흥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었다. 예심을 진행하던 중인 1935년 3월 15일 오랜 고문과 조사로 얻은 폐결핵으로 인해 병보석 되었다가, 같은 달 31일 사망하였다. 그해 4월 27일 함흥지방법원에서 항소 기각 판결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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