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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龍日

日

1898. 4. 8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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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林龍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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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철산(鐵山)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북도 철산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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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광복군총영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선천경찰서 투탄의거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8년 4월 8일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 여한면(餘閑面) 문봉동(文峯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조학연(趙學淵)이다. 광복군총영 결사대로 선발되어 1920년 미국의원단의 한국 방문을 기회로 삼아 추진된 선천경찰서 투탄의거에 참여하였다. 광복군총영은 1920년 국내 항일무장투쟁을 효율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압록강 북안의 콴뎬현(寬甸縣) 향로구(香爐溝)를 근거지 설치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군사기구이다. 이들은 국내 잠입을 통해 일제의 중요 기관 파괴와 고관 암살 등 대대적인 항일무장투쟁을 벌이고자 하였다. 1920년 8월 미국 국회의원 동양시찰단이 한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들에게 일제 식민지배의 부당함을 알리고 국내 독립운동의 기세를 올리기 위한 목적으로 무장 행동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3대의 결사대를 편성하여 국내에 파견하였는데, 1대는 서울, 2대는 평양, 3대는 선천과 신의주 방면으로 향하도록 하였다. 이상의 계획에 의해 광복군총영의 일원으로 활동하던 중 이학필(李學弼)·김응식(金應植) 등과 함께 3대 결사대에 선발되어 선천으로 파견되었다. 1920년 8월 21일 선천에 도착한 뒤 신성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박치의(朴致毅)와 박치조(朴治祚) 형제, 그리고 기독교 목사인 백시찬(白時瓚)과 박세건(朴世健)·김석창(金錫昌) 등과 만나 계획을 논의하였다. 이들은 미국 의원단에게 진정서를 제출하고 선천역과 선천경찰서 등에 폭탄을 던지고 만세시위를 벌이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독립에 대한 한국인의 열망을 전 세계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한 것이었다. 9월 1일 거사를 실행하여 선천경찰서를 폭파하고 최급경고문(最急警告文) 외 몇 종류의 격문(檄文)을 살포하였다. 거사 직후 일제 경찰의 수사가 시작되었으며, 9월 7일 신성중학교 기숙사에서 동료들과 함께 붙잡혔다. 유치장에 수감되어 있던 중 이학필 등 동료 몇 명과 함께 탈옥하여 만주로 건너가 본대에 복귀하였다. 1920년 11월 광복군총영장 오동진(吳東振)의 지시에 따라 국내로 잠입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이어갔다. 국내 잠입 당시 철산군 여한면(餘閑面) 문봉동(文奉洞)에서 출생 조학연으로 신분을 위장하여 활동하였다. 군자금 모집 활동 중 일제에 붙잡혀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1925년 7월 출옥하였으나, 선천경찰서 투탄의거에 참여했던 사실이 드러나면서 출옥과 동시에 다시 붙잡혔다. 신의주형무소에서 3년 간의 예심 기간을 보내고 1928년 8월부터 공판을 받았으며, 같은 해 11월 9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다. 항소의 핵심은 선천경찰서 투탄사건과 군자금 모집은 별개의 행위가 아니라 연속된 활동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 군자금 모집으로 4년의 형을 받고 수감생활을 마쳤기 때문에 같은 사건으로 다시 기소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항소가 받아들여져 1929년 3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사실상 무죄와 같은 면소(免訴)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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