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장지영

張志暎

1887. 4. 22 ~ 1976. 3. 15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장지영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서울문화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서울특별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조선산직장려계
  • · 신간회
  • · 흰얼모
  • · 조선어학회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서울 만세운동
  • · 조선어학회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87년 4월 22일 서울 서대문구(西大門區) 교남동(橋南洞)에서 의생(醫生)인 장은상(張殷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인동(仁同), 호는 열운(冽雲)이다. 5세부터 가숙(家塾)에서 한문을 배웠다. 1903년 17세에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한어과에 입학하였다. 1905년 6월 학교 졸업 후 모교인 관립 한성외국어학교에서 부교관으로 2년간 근무하였다. 상동교회와 상동청년회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였고, 주시경(周時經)을 만나 1908년 7월부터 강습소를 다니면서 국어 문법을 배웠다. 같은 해 9월 유일선(柳一宣)이 창립한 사립학교 정리사(精理舍)에서 학업을 지속하였다. 1910년 3월경 신민회(新民會)의 추천으로 황의돈(黃義敦)·박태환(朴兌桓) 등과 함께 북간도 롱징현(龍井縣)의 명동학교에서 국어교사로 근무하였다. 이후 평북 오산학교에 부임하여 1911년 7월부터 1912년 5월까지 국어와 수학을 교육하였다. 1911년 9월 105인 사건으로 학교 설립자인 이승훈(李昇薰)이 구속되고 학교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다시 서울로 상경하였다. 1912년 9월부터 상동교회에서 개설한 상동청년학원 교사 겸 학감으로 2년간 국어와 수학을 가르쳤다. 1914년 상동청년학원이 강제로 폐교되고 주시경이 사망하자, 주시경이 담당하던 국어 교육을 계승해서 경신중학교 교사 겸 교무주임으로 국어와 수학을 강의하였다. 교사로 활동하면서 민족자본을 양성하기 위한 실력양성운동의 일환으로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獎勵契)에 참여하였다. 1913년 만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과 연락을 위한 단체인 비밀결사 ‘흰얼모(白英社)’를 조직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계획을 접한 ‘흰얼모’ 동지들은 이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서 궐기를 선동하는 격문을 작성해 배포하기로 하였다. 조규수(趙奎秀)가 격문을 작성하고 인쇄할 때 자택을 장소로 제공하였다. 그해 2월 28일 새벽 서울 시내 주요 지점에 ‘국민대회’ 명의로 격문을 뿌렸다. 같은 해 초여름 의친왕 이강(李堈)을 상하이(上海)로 망명시키고자 했던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에 참여하였다. 대동단 영수인 전협(全協)의 부탁을 받아 만세시위에 사용할 「독립선언문」을 작성하였다. 하지만 거사 직전 관련자가 체포되면서 계획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1921년 12월 한글 연구를 위한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 조직에 참여하였다. 한글 연구의 결과로 1924년 5월 『조선어전』, 1930년 『조선어철자법강좌』를 출간하였다. 1926년 10월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교정부 기자를 거쳐 지방부장·문화부장·편집인 등으로도 활동하였다. 1928년 『조선일보』의 문맹퇴치운동을 주관하여 강연회와 학생·교사 지도, 상설 강습소 설치에 노력하였다. 1927년 1월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의 민족협동전선 조직으로 신간회(新幹會) 창립을 위해서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그해 2월 신간회 창립대회에서 서기(書記)로 임명되어 대회를 진행하였다. 창립총회에서 신간회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고, 조사부 간사로 활동하였다. 조선일보사 지방부장이라는 직위를 활용하여 『조선일보』에 「신간지회 소식」이라는 고정란을 만들어 신간회 본부와 지회 활동을 상세히 보도하였다. 그리고 근우회(槿友會)의 소식을 전하는 지면도 따로 만들어 보도하였다. 1928년 5월 안재홍(安在鴻)의 사설을 문제 삼은 일제는 『조선일보』 정간 해제 조건으로 사원들의 신간회 탈퇴를 요구하였다. 그해 8월 조선일보사 소속 간부들이 사퇴할 때, 신간회 조사부 상무간사직을 사임하였다. 1931년 5월 신간회 해소 이후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같은 해 7월 양정중학교에서 국어와 중국어 교육을 하였다. 조선총독부가 교과서 철자법을 개정할 때 총독부 철자법 조사회에 건의서를 제출하고 철자법 조사회 심의위원 등에 참여하여 주시경이 주장한 형태주의 철자법을 교과서 철자법에 반영하려고 하였다. 개정된 철자법은 1930년 4월에 실시되었다. 1931년 1월 조선어연구회는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로 명칭을 개칭하였다. 조선어학회는 개정된 조선총독부의 교과서의 철자법의 문제점을 고치고 한국어의 민족성을 지키기 위해서 독자적인 철자법 제정을 추진하였다. 1930년 12월부터 1933년 10월까지 조선어학회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위원으로 활동하여 ‘한글 맞춤법 통일안’ 공포에 기여하였다. 조선어학회가 표준어를 정하기 위해서 표준어 사정을 진행할 때 1936년 1월부터 표준어 사정위원으로 참여하였다. 그 결과 1937년 7월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간행하였다. 1937년 일제는 중일전쟁 이후 전시체제 확립을 위한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일본어 장려와 한국어 사용을 제한하였다. 그리고 한국어 보급과 한글 연구를 하는 조선어학회를 탄압하기 위해서 1942년 10월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켰다. 이 일로 붙잡혀 함흥경찰서에서 모진 고문을 받았고, 1944년 10월 예심면소로 풀려났다. 이후 주거 제한을 당해서 경기도 양주(楊州)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과 부국장, 조선어학회 6대 이사장, 한글학회 이사, 연희대학교·이화여대 교수 등을 지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임동현⋮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