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종식
張鍾植1869. 4. 4 ~ 1949. 2. 1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함안읍(3.19)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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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69년 4월 4일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함안면(咸安面) 강명리(康命里)에서 태어났다. 자는 목여(穆汝), 이명으로 장문식(張文植)을 사용하였다. 경남 함안군 함안 읍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함안지역 만세운동은 고종(高宗) 국상에 참여하고 3월 5일 돌아온 박건병(朴鍵秉)·강기수(姜琪秀)·이찬영(李讚榮)·조한휘(趙漢輝)·한관렬(韓灌烈) 등 지역 인사들이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소식을 전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서울 만세운동을 경험하며 자극을 받았고, 돌아와서 지역의 유림과 종교인, 민족주의 인사들과 접촉하며 함안 지역내 만세 운동들을 기획해나갔다. 함안 읍내 만세 운동도 이러한 흐름 속에서 계획되었다. 거사일은 3월 19일 함안읍 장날로 잡았고, 군중 동원과 동지 규합, 태극기 제작, 독립선언 전단 등사 등 역할을 분담하여 만세 시위를 준비하였다. 함안 읍내 만세시위는 3월 19일 정오 비봉산(飛鳳山)에서 고천제(告天祭)를 마친 후, 태평루(太平樓)에 태극기를 걸고 독립선언식을 하는 것을 신호로 시작되었다. 시위 행진이 시작되었을 때, 선두에서 군중을 이끌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처음 수백 명이었던 만세 군중은 시간이 가면서 3,000명 규모로 확대되었다. 이들이 식민지 지배 기관들인 함안 경찰관 주재소, 군청, 우체국, 일본인 학교, 법원출장소 등으로 나아갈 때 선두를 이끌었다. 함안 경찰주재소와 지원 출동한 마산경찰서 경찰력이 합세하여 폭력적 진압에 나서자, 시위대도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투석전을 감행하였다. 만세시위대는 주재소, 군청, 등기소 등의 내부로 진입하여 물리력을 행사해 기물과 서류를 파손하고 관계자들을 제압하였다. 3,000명의 대규모 인원이 참가한 함안 읍내 만세시위는 일본군 마산 중포병대대 병력까지 진압에 가담하면서 해산되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붙잡혔는데 명단에 포함되었다. 만세시위에 참여한 군중에 봉변을 당했던 함안경찰주재소의 일본인 경찰 등이 이후에 열린 재판정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주모자’ 중 한 명이라고 증언하였다. 등기소에 돌을 던지고 유리창을 파괴하였으며, 일제 경찰, 함안 군수 등의 폭행에 동조하였다는 것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결국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징역 1년을 받았다.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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