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계표
鄭桂杓1881. 12. 8 ~ 1942. 6. 12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이원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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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1년 12월 8일 함경남도 이원군(利原郡) 서면(西面) 한당리(閑堂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그 해 3월 10일 이원군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을 비롯한 7개 도시에서 만세운동이 일제히 일어났다. 얼마 지나지 않은 3월 5일에 함남 이원군 일대에 독립선언서와 만세시위 소식이 전달되었다. 3월 7일 이원군 동면(東面)에 위치한 이원군 천도교구실에서는 이원군 천도교교구장 김병준(金秉濬)이 주최하는 회합이 열렸다. 그 날 회합을 주도한 김병준은 이도재(李道在)·박승룡(朴承龍)을 비롯해서 이원군내 인사 15명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회람하였다. 그 독립선언서는 서울에서 개신교 신자 박용해(朴龍海)가 입수해서 비밀리에 가져온 것이었다. 그들은 이원군 서면 남문리(南門里)에 위치한 시장에서 장날이 서는 3월 10일에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들은 독립선언서를 토대로 이원군 만세시위에 배포할 선언서를 만들었다. 3월 8일 이원군 천도교구실에서 이도재는 만세시위에 군중에게 나누어 줄 선언서를 인쇄하였다. 그 선언서에는 만세시위를 주도하는 공시우(孔時祐)·김병준·김선태(金璿泰)·박승룡을 위시한 15명의 이름과 함께 “우리들 조선 민족은 세계의 대세에 따라 민족 자결의 원칙에 의해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2천만 동포에게 경고한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한편 만세시위를 준비한 15인은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 이원지단(利原支團)을 조직하였다. 3월 9일에는 인근 마을로 사람들을 보내서 3월 10일 만세시위 참여를 독려하였다. 3월 10일 오전 11시 30분경 조선독립단 이원지단이 주도하는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도재와 박승룡 등은 이원군 서면 남문리(南門里)에 위치한 시장에 모인 군중에게 미리 준비한 선언서를 배포하였다. 이를 받아 최병원(崔秉源)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장터에 모인 군중에게 나누어주었다. 김창렬은 장터에 모인 군중을 독려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오늘 즉 독립의 오늘에야 비로소 인간이라는 직분과 동양인이라는 의무를 다할 기회를 얻었다”라는 연설을 하였다. ‘조선민족독립단’ 독립기를 들고 시위대의 선두에 선 박승룡은 깃발을 휘날리면서 만세시위에 참여한 시위대를 인솔하였다. 시위 주도세력들의 노력으로 장터에 모인 군중이 시위에 참여함으로써 시위대의 규모는 800여 명에 이르렀다. 시위대와 함께 서면의 남문리(南門里)·서문리(西門里)의 이원군청·헌병분견소·공립보통학교·이원시장 일대를 행진하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일제 군경에 의해서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6월 30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 2월(미결구류일수 중 60일 본형 산입)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8월 1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심 취소 후 다시 징역 1년 2월(미결구류일수 중 60일 본형 산입)를 받았다. 재차 “만세시위는 조선민족으로서 정의·인도에 근거하는 의사행위로서 죄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상고하였으나, 그해 10월 2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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