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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봉화

鄭奉和

1891. 10. 12 ~ 1994.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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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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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파주(坡州)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파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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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건국포장(1999)

관련 사건

  • · 1919년 파주군 광탄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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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포장(1999) 1891년 10월 12일 경기도 파주군(坡州郡) 광탄면(廣灘面) 발랑리(發郞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정춘화(鄭春和)·정봉수(鄭奉水)이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3월 27일과 28일 파주군 광탄면에서 거행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0일 파주군 교하면(交河面)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웃인 이기하(李起河)·조무쇠(曺茂釗)·이인옥(李仁玉)·남동민(南東敏)·정갑석(鄭甲石)·정천화(鄭天和)·강흥문(康興文) 등과 함께 협의하고, 3월 27일 광탄면사무소 앞까지 이동하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를 위해 이기하·조무쇠 등 동료들과 함께 발랑리 곳곳을 다니면서 주민들에게 나라의 독립을 위한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3월 27일 주도자들과 함께 발랑리 주민들을 이끌고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광탄면사무소로 행진하면서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이날 광탄면사무소 앞에서의 만세시위는 일제 군경과의 충돌 없이 마무리되었으며,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3월 28일 주도자들과 함께 다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 만세시위는 인근의 조리면(條理面)과 고양군(高陽郡) 일부 지역으로까지 확산되어 대규모 만세시위로 발전하였다. 전날에 이어 발랑리 주민들을 이끌고 광탄면사무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 만세시위에는 광탄면의 여러 지역에서 전날보다 더 많은 약 1,000여 명의 주민들이 참여하였다. 이러한 사실에 고무되어 시위대와 더불어 광탄면사무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동지들과 협의해 인접한 조리면 봉일천리(奉日川里)로 이동해 이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였다. 이날은 봉일천 장터 장날로 많은 주민들이 모여일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주도자들과 함께 선두에서 시위대를 지휘해 ‘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봉일천 장터로 이동하였고, 도착 후 큰 목소리로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에 있던 사람들에게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러한 호소에 공감한 주민들이 동참하면서 시위대의 규모는 2.000여 명으로 확대되었다. 이에 더욱 고무된 시위대와 함께 조리면사무소를 공격하고, 면장과 면서기 등을 끌어내 참여시키는 등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자 인근의 일제 군경이 급파되어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발포하면서 무력 진압을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만세시위를 전개하던 광탄면의 박원선(朴元善)·정시화(鄭時和), 조리면의 김남산(金南山) 등 6명이 일제 군경의 총격을 받고 사망하였다. 이 일로 동료들과 함께 붙잡혀 1919년 6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그해 7월 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겪다가 1920년 2월 24일 가출옥으로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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