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영
鄭淳榮1868. 2. 2 ~ 1944. 11. 8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1919년 수원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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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1) 1868년 2월 2일 경기도 수원군(水原郡) 우정면(雨汀面, 현 화성시 우정읍) 수촌리(水村里)에서 태어났다. 우정면사무소에서 사환으로 근무하다 퇴직하여 마을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촉발한 만세운동은 곧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만세시위 소식이 인근의 경기도 수원군에도 전파되었다. 수원군 장안면(長安面)과 우정면에서는 장안면 수촌리(水村里)의 천도교 순회전도사이자 마을의 구장이었던 백낙열(白樂烈), 주곡리의 차희식(車喜植)과 장제덕(張濟德), 석포리(石浦里)의 차병혁(車炳赫)과 차병한(車炳漢) 등 천도교도들과 감리교계 기독교 인사들을 중심으로 매우 조직적으로 만세운동을 계획하게 되었다. 두 지역은 상당히 일찍부터 동학이 전파되어 1910년에 이미 천도교 남양교구 산하에 8곳의 전교실이 설립되어 있었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 및 1904년 천도교의 갑진개혁운동(甲辰改革運動)에 적극 참여한 지역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1905년을 전후해서는 감리교계 기독교가 선교를 확장하면서 수촌리·장안리·제암리에 교회가 설립되어 기독교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장안면과 우정면의 주민들은 1919년 4월 3일 대대적인 연합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따라 평소 나라의 독립을 희망하고 있던 인사들이 백낙열과 함께 장안면과 우정면의 만세운동을 결의하고, 4월 3일을 만세운동의 거사일로 결정하였다. 4월 3일 만세시위는 장안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4월 3일 오전 7시부터 차희식과 장제덕은 주곡리의 주민들에게 “오늘 나라를 독립시키기 위해 독립만세를 외칠 것이니, 모두 몽둥이를 지참하고 나와 참가하라”고 주민들을 독려하였다. 이미 사전에 차희식과 장제덕으로부터 만세시위에 계획을 전달받고, 그 취지에 동의하여 곧바로 참여를 결의했기 때문에 몽둥이를 챙겨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차희식과 장제덕의 지휘에 따라 다른 주민들과 함께 시위대를 갖추고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며 석포리를 거쳐 수촌리로 행진하였다. 다른 주민들과 함께 수촌리의 천도교 교구실로부터 받은 태극기를 흔들며 일제히 호응하여 ‘대한독립만세’를 따라 외쳤다. 우정면 여러 지역의 시위대가 합류함에 만세시위의 열기는 뜨거워지기 시작하였다. 이때 백낙열이 “면사무소로 가자”고 외쳤다. 곧바로 호응하여 시위대의 선두에 태극기를 앞세우고 장안면사무소로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장안면사무소 앞에 도착하자, 이날이 장날이 아니었음에도 이미 시위대는 1,500여 명의 규모로 확대되었다. 이 날의 시위에서는 선두에 서서 장안면사무소를 파괴하는 데 참여하였다. 이를 본 백낙열이 만류하자, “덕수궁(德壽宮)도 화재를 만나 불타지 않았는가. 면사무소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라고 반문하며 이규로(李奎魯)·차인관(車仁寬) 등과 함께 더욱 적극적으로 장안면사무소를 파괴하고 불을 질렀다. 이후 백낙열·장제덕·차희식 등의 지휘에 따라 우정면사무소로 행진하였다. 대규모 만세시위가 발생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우정면장과 직원들은 이미 도주하고, 우정면사무소는 비어있었다. 이에 시위대의 다른 주민들과 함께 우정면사무소에서도 공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집기와 서류, 건물 등을 모두 태워버렸다.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화수리(花樹里)에 위치한 일제의 경찰주재소였다. 백낙열·차희식 등의 지휘에 따라 경찰주재소를 에워싸고 2,000여 명 규모의 시위대와 함께 일제히 돌을 던지며 일제의 경찰주재소를 공격하였다. 격렬한 만세시위를 만난 일제 순사부장 가와바타 타로(川端太郞)는 공포탄을 쏘며 만세시위의 해산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다른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해산 명령을 무시하고 더욱 주재소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자, 가와바타 순사부장는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기를 발포하였다. 이로 인하여 주민 1명이 흉탄에 피격되어 현장에서 사망하는 등 부상자가 속출하였다. 이에 분노한 시위대 함께 가와바타 순사부장을 향해 돌을 던지고, 주재소 건물을 파괴하여 완전히 불태운 뒤에야 해산하였다. 4월 4일 장안면장 김현묵의 보고에 의해 장안면과 우정면의 격렬한 만세시위의 구체적인 상황이 일제 당국에 알려졌다. 일제는 바로 다음날인 4월 5일 조선주차군 79연대 소속의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중위와 30여 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만세시위 참여자에 대한 조사, 색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일제 군대는 수촌리를 시작으로 만세시위에 참여한 장안면과 우정면의 각 마을을 돌며 주민들을 고문 및 학살하고, 모든 가옥을 불태우는 등 만세시위에 대한 보복을 자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 군대에 붙잡혔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소요죄를 구성할 수는 있어도 내란죄를 구성할 수는 없다”는 결정을 받아 경성지방법원을 관할법원으로 지정받았다. 같은 해 8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변호사들의 사법 절차 문제 지적 법정투쟁의 결과 공소 불수리 처분을 받았다. 그해 12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살인죄·방화죄 등으로 징역 5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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