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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任春

鄭任春

1890. 5. 20 ~ 1956. 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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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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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남해(南海)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남해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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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남해군 남해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0년 5월 20일 경상남도 남해군(南海郡) 설천면(雪川面) 문항리(文巷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3일과 4일 남해군 남해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4월 3일과 4일 남해면 만세시위의 경우도 이예모(李禮模)가 하동군 민족주의 인사들에게서 독립선언서를 구해 온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는 ‘대한독립선언서’라는 이름으로 3월 18일 하동군 하동면 만세시위를 주도한 인사들이 자체 작성한 것이었다. 이예모는 뜻있는 인사들을 모아서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이때 정학순(鄭學淳)·윤주순(尹柱舜)·유찬숙(柳贊淑)·정순조(鄭順祚)·정몽호(鄭夢虎) 등과 함께 참석하였다. 여기에서 4월 3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만세시위 준비를 시작하였다. 시위 도구 제작과 군중 동원을 위한 동리별 연락 등이 계획되고 주도 인사들의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다. 시위대의 중심이 되는 큰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제작, 군중 동원을 위한 각 동리별 연락 등에서 맡은 바 역할을 하였다. 거사일인 4월 3일, 만세시위는 오후 3시경부터 설천면 남양리에서 시작되었다. 이예모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선창하자,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불렀다. 그리고 장대에 높게 단 큰 태극기를 앞세우고 남해면을 향해 가면서 군중을 지휘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고현면(古縣面)에서 시위를 마치고 해산하였다. 이유는 고현면 면장인 김치관(金致寬)이 고현면 경찰주재소에 시위 사실을 밀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예모·정순조 등 시위 주도자들과 함께 논의하여 이튿날 남해면 장날 시장에서 다시 만세시위를 재개하기로 하였다. 4일은 장날이기 때문에 보다 많은 사람이 모일 것을 예상하였기 때문이다. 4월 4일 윤주순·정몽호·정순조·정학순 등과 함께 남해면 시장으로 들어가자, 설천면 시위에 참가하였던 사람들과 장날을 맞이하여 군내 각지의 주민이 모여들었다. 오후 2시경 만세시위를 시작하자 순식간에 수백 명의 사람이 만세를 따라 부르며 호응하였다. 정순조 등과 시위대의 선두에서 읍내 거리를 행진하며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군청, 경찰관주재소, 금융조합사무실, 우편국, 공립보통학교 등 일제 기관들에 몰려가서 집기나 기물을 파손하고 직원들에게 만세를 부를 것을 강요하였다. 주재소에서는 만세시위로 붙잡힌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였고, 군청에서는 군중이 앞뜰을 차지하고 군수에게 만세를 부르도록 하였다. 하지만 시위대는 사천(泗川)경찰서의 증원 병력이 도착하면서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 경찰들은 시위대를 향해 총검을 휘두르며 강제 해산에 나섰고, 시위대가 흩어지자 대대적인 주모자 색출과 체포가 이어졌다. 그 결과 20명이 넘는 사람들과 함께 시위 주도를 하였다는 이유로 체포되었고, 일제 경찰의 혹독한 심문을 거친 후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7월 15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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