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在雲
鄭在雲1895. 5. 4 ~ 1950. 4. 24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2)
관련 사건
- · 1919년 하동군 진교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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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1992) 1895년 5월 4일 경상남도 하동군(河東君) 금남면(金南面) 대치리(大峙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양(晉陽)으로, 임진왜란 때 무장으로 공을 세운 정기룡(鄭起龍)의 후손이다. 어릴 적 집안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현산학교(현 금양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신학문을 배웠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촉발한 만세운동은 곧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만세운동 소식이 경남 하동군 진교면(辰橋面)에도 알려졌다. 하동군 진교면은 하동면 다음으로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일본인들의 경제적 진출 과정에서 진교면 주민들이 피해를 입은 지역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만세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정재백(鄭在伯)·이원태(李源泰)·이홍식(李弘植)과 함께 3월 29일 진교면 진교리 장날에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심하였다. 정재백 등과 함께 미리 만세시위에 사용할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거사 당일인 3월 29일 정오 즈음에 진교리 장터에는 약 1,000명의 군중들이 모였다. 정재백·이원태·이홍식과 함께 장터에 모인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그러자 군중들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시장 일대를 행진하였으며, 시위대를 이끌고 진교리 주재소에 이르러서는 독립만세를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주재소에 있었던 일제 군경이 총검을 들고 나와서 시위 주도자들을 무력으로 검거하였다. 일제 군경의 검거에 분노한 시위대들은 주재소를 포위하고 검거된 인사들의 즉각적인 석방을 요구하였다. 일제 경찰이 검거자 석방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자, 시위대는 주재소 안으로 진입하였다. 그러자 하동 경찰서에서 급파된 일제 경찰이 총검으로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여 일시 해산하였다. 3월 30일 다시 모인 군중 1,000여 명이 진교리 경찰주재소로 가서 전날 검거된 시위 주도자에 대한 석방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하동 경찰서에서 출동한 일제 헌병과 경찰은 이를 무시하고 재차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하였고, 진교리 시위에 참여한 인사들에 대한 색출을 시도하였다. 그 과정에서 진교리 만세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붙잡혔다. 1919년 5월 27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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