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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點時

鄭點時

1897. 9. 7 ~ 1937. 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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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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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陜川)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합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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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합천군 초계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7년 9월 7일 경상남도 합천군(陜川郡) 초계면(草溪面) 대평리(大平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한자를 달리한 정점시(鄭點是)를 썼다. 1919년 3월 합천군 초계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합천군의 만세운동은 3월 18일 삼가면(三嘉面) 읍내 시위를 시작으로 거의 매일 군내 각 지역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3월 23일 삼가시장 만세시위에는 합천군 전역은 물론 인근 의령군(宜寧郡) 주민까지 합세하여 13,000명에 달하는 대규모 군중이 참가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3월 21일 초계면 만세시위도 계획되었다. 초계면 제일의 부호였던 노호용(盧浩容)과 명망 있는 유림이었던 이몽우(李夢雨) 등과 함께 인근의 만세운동 소식을 접하고 향리에서의 거사를 계획하였다. 청년들이었던 이들 세 사람이 협의하여 만세운동을 선동하는 격문을 짓고 초계리 장날인 3월 21일을 기해 거사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태극기는 나무에 새겨서 찍어내는 방법을 사용해 노호용의 집에서 밤새 제작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군내 각 면에 은밀히 전달하였는데, 이때 초계·적중(赤中)·청덕(靑德)·쌍책(雙册)·덕곡(德谷) 등 5개 면을 담당하였다. 거사일인 3월 21일 노호용·이몽우와 함께 초계장터로 갔다. 만세시위는 장터에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오후 1시 경부터 시작하였다. 장터에 모인 군중을 상대로 주도 인물들과 함께 준비한 격문을 읽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미리 연락을 받고 모인 사람들과 장터의 군중들이 호응하여 시위대는 삽시간에 4,000명으로 불어났다. 시위대의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장거리를 누볐고, 일부 청년들과 합세하여 초계우편소(草溪郵便所)로 가서 내부 기물을 파손하고 통신선을 절단하였다. 이후 시위대와 함께 순사주재소로 이동해 건물을 포위하고 투석전을 전개하여 유리창 등을 파손하였다. 이에 대응해 주재소의 일제 경찰들이 시위대를 향해 공포탄을 발사하자, 분노한 군중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발포한 일제 경찰 2명을 붙잡아 구타하는 등 적극적으로 맞섰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합천경찰서 증원 병력이 도착해 시위대 진압에 가세하면서 국면이 전환되었다. 일제 경찰은 주재소 경찰 등이 구타를 당해 큰 부상을 당한 것 등을 빌미로 시위대를 폭도로 규정하고 무자비한 진압을 전개하였다. 시위대에게 근접하여 총검을 휘두르고, 결국 발포까지 하였다. 함께 시위대의 선두에서 만세를 부르던 김장배(金長培) 등 2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고, 이원탁(李源鐸)·권국서(權國瑞) 등 10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일제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에 시위대는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일제 경찰은 시위를 주동한 인물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작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성만영(成萬永)·김덕명(金德明)·이원화(李源華) 등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8월 8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소요죄와 전신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고, 상급법원에서 형량이 조정된 정황이 발견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이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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