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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俊植

俊植

1900. 2. 18 ~ 1966.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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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俊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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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순천(順川)광복군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순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한족회
  • · 신흥무관학교
  • · 조선혁명당(군)
  • · 대한민국임시정부
  • · 한국광복군

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2) 1900년 2월 18일 평안남도 순천(順川)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수안(遂安)이고, 호는 화강(火崗)이다. 이명으로 이웅(李雄)·임병웅(林炳雄)·왕중일(王中一)·증손(曾孫)·진탁(辰卓)·휘석(彙碩) 등이 있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7월 중국의 군사학교 입학을 위해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하면서 중국 군관학교 입학을 모색하였다. 1919년 중국 윈난성(雲南省) 쿤밍(昆明)에 있는 윈난강무학교(雲南講武學校)에 입학하였다. 윈난강무학교는 1909년 중국 군벌 탕지요(唐繼堯)가 설립한 군사학교로 1910년대부터 이곳을 거쳐 간 50여 명의 한인 청년들은 훗날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의 인적 기반이 되었다. 1921년 윈난강무학교 졸업 후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만주로 갔다. 만주에서 ‘자유시사변’ 이후 항일무력을 재정비하기 위해 조직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 가입하였다. 그 후 1924년 11월 조직된 정의부(正義府)에 들어가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1927년 오동진(吳東振)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자 후임으로 정의부 군사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27년 4월 정의부 군사위 대표로 지린성(吉林省) 신안둔(新安屯)에서 민족유일당을 조직하기 위한 회의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1928년 만주지역 민족유일당운동 결과 남만주를 관할할 단체로 조직된 국민부(國民府)에서 중앙집행위원회 군사위원장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또한 1929년 12월 국민부를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의 중앙위원 겸 군사위원회 위원장을 겸하였다. 조선혁명당은 만주에서 활동하던 정의부·신민부·참의부가 혁신의회와 국민부로 분리된 후 국민부가 조직한 남만주의 유일당이다. 국민부 및 조선혁명당 산하 무력단체인 조선혁명군 참모장으로도 활동하였다. 조선혁명군은 1929년 3월 조직된 조선혁명당의 당군으로 1938년 9월까지 남만주 일대에서 활발하게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1920년대 후반부터 당시 만주에 널리 퍼지고 있던 사회주의 이념과 방략을 수용하였다. 1930년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에 입당하였으며, 조선공산당 재건설위 만주부 간부로 활동하였다. 국민부 내 우파의 좌파 축출 과정에서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당원 및 조선공산당 재건설위원회 만주부 간부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탄압을 받았다. 그 결과 조선혁명당(군) 내 민족주의계열과 갈등을 일으키고 축출되기에 이르렀다. 1930년 10월 만주에서의 독립군 활동이 어려워지자 관내로 활동지역을 옮겨 상하이로 갔다. 상하이는 1919년 중국의 군관학교에 입교하기 위해 잠시 머무르면서 활동했던 곳이었다. 또한 상하이로 가게 된 데는 사전에 임시정부 요인들과 연락이 있었다. 상하이 임시정부로서는 만주에서 독립전쟁을 수행한 풍부한 경험이 있는 군사지도자가 필요하였다. 상하이에 도착한 후 임시정부 요인들과 교류하였다. 만주를 떠나 관내지역으로 가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1931년 9·18사변에 즈음하여 상하이에서 김철(金澈)·박창세(朴昌世) 등과 함께 한국군인회(韓國軍人會)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한인애국단의 이봉창(李奉昌)이 일왕을 폭살하려던 작탄(炸彈) 항일투쟁에 고무되어 조직된 한국군인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한국군인회는 간장(簡章)도 발표하였다. 계속하여 김구(金九)와 연결되어 작탄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독립투쟁은 온건한 방법으로는 안 되며 투탄항쟁방법을 취하여야 큰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국내외로부터 상하이 등지로 찾아온 유능한 청년을 한인애국단에 소개하였다. 이러한 무장항쟁 계획과 그 활동이 일제 영사관경찰에 알려져 감시를 받던 중 윤봉길의 훙커우공원의거(虹口公園義擧) 이후 상하이를 탈출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중국군에서 복무하였다. 1930년대 중반 이후 광둥(廣東)에서 활동하였다. 1934년 경 김병인(金秉仁)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1930년대 후반 광둥에서 중국군 보병소좌로 활동하면서 광둥에 있던 한인 청년들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1937년 일제의 전면적인 중국 침략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임시정부가 창사(長沙)·광저우(廣州) 등지로 이전하게 되자 당시 중국군 고급장교로 재직하면서 임시정부 청사를 확보하는데 많은 지원을 하였다. 1939년에는 중국군에서 자진 예편하고,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그해 10월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조성환(曺成煥)·황학수(黃學秀) 등과 임시정부 군사특파단을 구성하여 시안에서 병사모집, 군사훈련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1940년 9월 17일 새벽 충칭(重慶) 자링빈관(嘉陵賓館)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이 거행되어 임시정부의 국군이 창설되었다. 광복군 총사령부 창설 직후 총사령부 참모에 임명되었다. 동년 11월 광복군 제1지대장에 임명되어 적극적인 초모공작(招募工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1년 노태준(盧泰俊)·안춘생(安椿生)·노복선(盧福善)·조인제(趙仁濟)·이건우(李健宇)·김자동(金紫東)·이석화(李錫華) 등 제1지대 간부와 더불어 타이위안(太原)·다통(大同)·스즈장(石家莊)·린펀(臨汾) 등지에서 옌시산(閻錫山)군과 연합해 일본군에 항전하였다. 이 때 광복군 제1징모분처 주임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광복군 총사령부의 지청천, 황학수, 김학규, 이복원, 김광 등과 함께 국내외 동포들의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글이나 군사학과 관련된 글들을 광복군 기관지 『광복(光復)』에 기고하기도 하였다. 1942년 임시의정원 비서장을 겸직하여 의장을 대리하였으며, 중령구(中領區) 의원 선거회장도 맡았다. 그 해 8월부터 군무부 부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43년에는 광복군 총사령부 고급참모로 전입되었고, 동년 5월 충칭에서 개최된 한국독립당 총회에서는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11월에는 유동열(柳東說)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탈당하고 1945년 2월, 한국독립운동 진영의 통일을 위하여 유동열 등과 함께 신한민주당을 창당하고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김광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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