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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昌贇

鄭昌贇

미상 ~ 1920.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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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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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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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만주방면

지도 위치

광역 지역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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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신민회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5) 함경도 출신이다. 자료의 한계로 출생시기는 알 수 없다. 8살 때 손가락을 잘라 어머니를 구한 효자로 알려져 있다. 청년시기 계봉우(桂奉瑀)의 추천으로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게 되었다. 신민회에서 이동휘(李東輝)를 알게 되었으며, 추후 이동휘의 장녀 이인순(李仁橓)과 결혼하였다. 이명으로 한자를 달리한 정창빈(鄭昌斌)을 썼다. 을사늑약 이후 국권회복을 위하여 1907년 양기택(梁起鐸)·전덕기(全德基)·이동휘·안창호(安昌浩) 등 7인이 창건위원이 되어 신채호(申采浩)·윤치호(尹致昊) 등과 함께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신민회의 궁극적 목적은 국권회복을 통하여 공화체제의 자유독립국을 세우는 것이었다. 이들은 실력양성을 국권회복을 위한 제일 중요한 요소로 삼고, 교육운동, 계몽운동, 민족산업진흥운동에 진력하였다. 신민회 조직 초기부터 참여하여 1911년 1월경 계봉우·장기영(張基永)·오영선(吳永善) 등과 함께 만주 북간도 지역으로 망명하여 계림촌(鷄林村) 부근에서 교사로 활동하였다. 1913년 1월 13일 전 간민교육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이동춘 등 25명이 발기인이 되어 「간민회조직총회소집통지서(墾民會組織總會召集通知書)」를 배포하였다. 이때 발기인 25명 중의 한명으로서 교육을 통해 민족교육을 발전시켜 나갔다. 같은 해 2월 26일 간민회 창립총회가 국자가(局子街) 모범학당에서 개최되자 이에 참석하였다. 1918년 중순경 이동휘의 지시로 부인 및 가족들과 함께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여, 그곳의 신한촌에 정착하게 되었다. 도비하에 있는 화동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면서 한인 자녀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진력하였다. 당시 학생은 40여 명이 있었다. 또한 부인과 함께 조그마한 사업을 통해 경제적으로 이동휘를 돕고 있었다. 같은 해 8월 29일 신한촌 한민회의 명의로 인쇄물을 배포하고, 국치일 기념행사를 거행하였다. 생도 수십 명은 태극기를 휘날리며 신한촌을 순회하였고, 한민학교 운동장에 모여 국치기념회를 개최하였다. 당시 지리에 대하여 강연을 하였고, 이인찬(李仁贊) 등 3명과 함께 기념사도 하였다. 1919년 11월 부인 이인순이 장티푸스로 사망한 것에 이어 아들도 사망하자, 상심한 나머지 이듬해 1월 27일 자살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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