黃文益
黃文益1879. 12. 9 ~ 1953. 5. 8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협회
- · 흥업단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흥업단의 자금모집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79년 12월 9일 경상남도 밀양군(密陽郡) 부북면(府北面) 대항리(大項里)에서 태어났다. 호는 국사(菊史)이고 이명은 한자가 다른 황문익(黃文翊)과 황영주(黃永周)를 사용하였다. 1907년 손경헌(孫庚憲)의 주도로 설립된 대한협회(大韓協會) 밀양군 지부에 가입하여 애국사상 고취에 힘쓰며 활동하였다. 1913년 4월 남만주(南滿洲)로 망명하여 펑청현(鳳城縣) 펑황청(鳳凰城)에 정착하였다. 1919년 푸쑹현(撫松縣)에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부속기관으로 조직된 흥업단(興業團)에 가입하고, 그곳 백산학교(白山學校)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1920년 11월경 흥업단 단장 김호(金虎)와 외교부장 김성규(金星奎)로부터 국내로 들어가 군자금을 모집해오라는 명령을 받은 단원 이만준(李萬俊)이 환런현(桓仁縣)의 한교공회(韓僑公會) 회장 손경헌을 찾아와 방책을 물었다. 이에 손경헌이 지시하는 바대로 그 부하인 김인제(金仁濟)·최성기(崔聖基)를 대동하고 이만준을 지휘자로 하여 각자 권총 1정과 탄약 40여 발을 지급받아 국내로 잠입하였다. 그 후 이들 특파원 4명의 활동은 1922년 2월까지 사이에 경남 밀양·양산(梁山)과 대구(大邱) 등지에서 10여 명의 동지를 연쇄적으로 규합하고 경남·북 각지에서 약 6만원의 군자금 모집 성과를 낸 것으로 일제 관헌에 파악되었다. 관련 정보 문건들에서 다수의 인명이 거명되는데 거기서 그의 이름은 확인되지 않는다. 1921년 11월 8일 마산지방법원검사국 밀양지청에서 '기소중지 불기소' 처분이 내려졌다. 1922년 2월 8일 대항리 주민 황성직(黃成直) 등 3명과 함께 4인 연명으로 “오랑캐인 일본이 동방예의지국을 침범하여 걸주(桀紂)와 같은 정사로 우리 민족의 고통이 많으므로 속히 물러가지 않으면 이토오(伊藤)처럼 죽이리라”는 내용의 편지를 조선 총독에게 보냈다 하여 일제 경찰에 잡혀가 조사받았다. 그러나 명의만 도용되었음이 밝혀져 풀려났다. 1922년 11월 흥업단 사건 관련으로 서울에서 체포된 이만준 등 7인이 검사국으로 송치된 직후인 1923년 1월 15일에도 ‘기소중지 불기소’ 처분을 받았고, 그 후 체포되거나 재판받은 바 없다. 일부 문헌에서 "1922년 12월 일경에 체포되고 1923년 (봄) 대구지방법원에서 (1년 6월의) 실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고 기술하는 것은 근거 불명인 서술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하였다. ⋮김영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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