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패관
張貝寬1867 ~ 1908. 1. 29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2003)
관련 사건
- · 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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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2003) 경상남도 고성군(古城郡)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867년생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전라북도 금구군(金溝郡) 수류면(水流面) 원평리(院坪里, 현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로 이주하였고, 이곳에 있었던 광산에서 사금을 채취하며 생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1907년 광무황제(고종) 퇴위와 군대 해산 이후 일제의 식민지 강점 침략 야욕이 심화되자, 전국 각지에서 해산군인 및 유학자 등은 물론 일반 민중의 항일 무장 봉기가 격화되었다. 이에 전북지역에서도 고군산도 등의 도서지역이나 노령산맥 일대의 산악지역 뿐만 아니라 금구와 같은 평야지역에서도 소규모 의병부대를 포함한 자발적인 의병항쟁이 격화되었다. 1907년 5·6월경 일제 침략에 저항하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동료 이칠봉(李七峰)의 부친이 의병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80여 명 규모의 소규모 의병부대에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의병부대의 여러 전투에 참여하였는데, 1908년 1월 13일 80여 명의 의병부대가 김제군(金堤郡)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는 작전에도 참여하였다. 해당 전투에서 의병부대는 “일본인, 한국인에게 다대한 손해를 가하였다”라고 일본군이 보고할 정도로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퇴각 과정에서 속도 빠른 일본군 기병대의 추격을 물리치지 못하고, 금구면 원평리 일대에서 따라잡혔다. 이에 추격을 뿌리치려는 교전이 격렬하게 벌어졌고, 이칠봉의 부친과 의병 5명이 전사하였다. 이때 인후부에 총상을 입고 이칠봉·최내홍(崔乃洪)과 함께 후퇴하여 원평리 마을 인근에서 계속 활동하였지만, 결국 일본군에게 붙잡혔다. 일본군은 그들에게 투항을 권유하였으나, “십 수 명의 동료가 인근에 잠복하고 있을 것이다”하고 완강히 거부하며 탈출을 시도하였다. 1908년 1월 29일 오후 6시경에 탈출의 기회가 왔다고 파악한 세 사람은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일본군에게 저지당하였다. 몽둥이를 들고 극력 저항하다가, 결국 일본군의 총에 맞고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구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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