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춘
全化春미상 ~ 1908. 7. 6
포상 정보
- · 애국장(2010)
관련 사건
- · 후기의병(강원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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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2010) 자료의 한계로 출생시기와 출신지는 알 수 없다. 1907년 6월 21일 의병에 가담하여 오정묵(吳正默, 혹은 吳敬黙)·한상열(韓相烈)·김용상(金龍翔)·노면승(盧免承)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자, 고종은 이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1907년 7월 만국평화회의의 개최지인 네덜란드 헤이그에 이준(李儁)·이상설(李相卨)·이위종(李瑋鍾)을 밀사로 파견하였다. 일제는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묻고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그리고 바로 대한제국 군대를 개혁한다는 미명 하에 그해 8월 1일 군대를 강제해산하였다. 이 과정에서 군대 해산에 불복한 서울 시위대의 봉기가 8월 1일 발생하였다. 시위대의 봉기 소식이 각지로 알려지면서 지방에 있던 원주진위대(原州鎭衛隊)·수원진위대(水原鎭衛隊) 소속의 강화분견대(江華分遣隊) 등에서 군인들이 해산을 거부하고 봉기하기 시작하였다. 강원도 지역에서는 1907년 8월 5일 민긍호(閔肯鎬)의 주도로 원주진위대가 지방 진위대 가운데 처음으로 봉기하였다. 그 참여인원은 258~270여 명이었고, 점차 군인뿐만 아니라 이에 호응하는 사람들이 대거 의병에 합류하면서 의병부대의 규모가 증가하였다. 원주진위대와 이에 합세한 주민들의 의병 봉기 소식은 원주 인근의 다른 지역으로 퍼져났고, 횡성 지역에서는 오정묵과 한상열이 동지들을 규합하여 포군 수백 명을 거느리고 의병을 일으켰다. 오정묵은 횡성군 수순교(首巡校) 겸 포수계장(砲手契長)으로 있던 포군 출신으로 휘하의 산군 포수들을 중심으로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민긍호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포병대장으로 제천(堤川)·풍기(豐基)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한상열은 횡성에서 거의하여 약 200명의 의병부대를 거느리며 횡성·지평(砥平)·홍천(洪川)·원주(原州)·평창(平昌)·영월(寧越)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07년 (음)6월 21일 횡성에서 우군(右軍)을 맡은 오정묵과 좌군(右軍)을 맡은 한상렬이 의병부대를 조직할 때 한상렬의 좌군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이후 한상렬 의병부대에서 스스로 선봉장(先鋒將)이 되어 강릉(江陵)·평창·홍천·횡성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07년 말 관동창의대장 이인영(李麟榮)을 중심으로 양주(楊州)에 집결하여 서울 진공작전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여러 지역으로 분산되어 서울로 이동을 시도하던 의병부대는 진로를 차단하려했던 일제 군경과 횡성·영월·홍천·그리고 경기 일대에서 수십 차례 교전을 벌여야 했다. 한상렬 의병부대도 민긍호·이인영(李麟榮)·심상희(沈相熙) 등 의병장이 거느리는 의병부대와 함께 횡성과 지평 사이에 있는 고모곡(毛古谷) 일대에 주둔하며 의병을 소모하고 군자금을 모으는 등 서울진공작전을 위한 군사력 보강에 주력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이를 차단하려 했던 일제 군경 토벌대와 여러 차례 교전을 벌였다. 같은 해 12월 13일 한상렬·민긍호·한갑복(韓甲復)·윤성옥(尹成玉) 등이 거느린 1,200~1,300명의 연합 의병부대는 횡성 동평(銅坪, 구릿들, 현 황성군 갑천면 매일리) 일대에 잠시 주둔하였다가 양주를 목표로 각 부대별로 이동하였다. 이때 민긍호 의병부대는 홍천군 서석면(瑞石面) 방면으로 나아갔고, 나머지 부대는 유동(柳洞) 및 당현(堂峴, 현 청일면 춘당리)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이에 일제 토벌대는 유동 주변에 둔집(屯集)해 있었던 의병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이동하여 기습 공격을 벌였다. 약 3시간에 걸친 치열한 교전을 벌였으나 120~130명의 의병이 사망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 한상렬 의병부대는 전군대장(前軍大將) 이창호(李昌五), 중군대장(中軍大將) 김화춘(金和春), 후군대장(後軍大將) 한상오(韓相五) 등 휘하의 의병을 이끌고 횡성 동북부에서 홍천 일대에 걸쳐 의병 소모활동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일본군 토벌대와 수차례 전투를 수행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한상렬 휘하에서 여러 전투에 참여하였다. 그러던 중 청량리 전투에서 허리부분에 총상을 입고 귀향하여 자택에서 상처의 치료에 전념하였고, 몸이 회복되자 1908년 2월 재차 의병운동에 가담하여 김용상(金用翔)·한상렬·노면승(盧免承) 등과 함께 활동을 재기하였다. 그러던 중 춘천(春川)에서 일본군에게 패하고 험산리[嶮山里, ‘험산리’라는 지명은 없으며 홍천 서석면(瑞石面) 검산리(儉山里)의 오기로 추정]에서 부대원과 떨어져 횡성군 춘당(春堂) 부근에 일제 군경의 추적을 피해 은신하였다. 그러나 1908년 7월 6일 밀정의 첩보에 의해 춘당 일대에 은신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첩보를 입수한 횡성순사주재소 수비대장 이하 14명, 순사 2명 등으로 구성된 일제 토벌대는 해당 지역을 수색하여 춘당 서남쪽 산골의 토굴을 발견하고 공격을 하였다. 이때 현장에서 붙잡혔다. 신문을 마치고 이송되어 가던 중 횡성군 청일면 율실리(栗實里) 부근에서 도주의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일본군에게 총살당해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원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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