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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강산

高崗山

미상 ~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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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고강산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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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만주방면

관련 단체

  • · 신민부
  • · 한족총연합회

포상 정보

  • · 애국장(2010)

관련 사건

  • · 하얼빈(哈爾濱)일본총영사관 습격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10) 출신지와 생년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다. 다만, 한자가 다른 고강산(高岡山)과 고강산(高江山) 등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북만주 일대에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1925년 김좌진(金佐鎭)과 김혁(金赫) 등이 조직한 신민부(新民府)에서 별동대장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1930년 1월 김좌진이 암살당하자 일제의 행위라 판단하고 복수전을 펼치기 위해 5월에 하얼빈(哈爾濱)의 일본 총영사관을 습격하고자 결사대의 일원이 되어 참여하였다. 신민부는 북만주 일대의 독립운동 단체들을 통합하고자 1925년 3월 10일에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닝안현(寧安縣) 성내(城內)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다. 신민부 창립을 주도한 인물은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의 김좌진, 대한독립군정서(大韓獨立軍政署)의 김혁 등이었다. 특히 김좌진은 신민부 발족 후에 독립군 편성과 훈련에 주력하고자 보안대와 별동대를 조직하였다. 보안대와 별동대는 권총과 소총으로 무장한 530여 명으로 구성되었다. 보안대는 제5대대, 별동대는 별도로 구성되었다. 두 부대는 모두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인 김좌진의 통솔 아래 활동하였다. 그는 별동대에 속하여 활동하였다. 별동대는 1927년 9월 하얼빈에서 친일 기관인 조선민회(朝鮮民會)를 습격한 후 회장인 배두산(裵斗山)을 체포해 처형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별동대는 주로 재만동포(在滿同胞)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친일 단체를 와해시키고 친일파를 축출, 응징하는 무장 활동에 주력하였다. 당시 김좌진의 휘하에서 별동대장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신민부는 1928년 1월 일본군의 본부 습격으로 다수의 간부가 체포되었고 1928년 10월 발생한 빈주사건(賓洲事件)을 계기로 군정파(軍政派)와 민정파(民政派)로 조직이 분열되면서 갈등이 심화하였다. 이후 김좌진이 이끄는 군정파는 한족총연합회의 중심 세력이 되었고, 민정파는 국민부(國民府)에 참여함으로써 신민부는 해체되고 말았다. 당시 군정파인 김좌진의 휘하에 있었기 때문에 한족총연합회가 조직되자 간부로 활동하였다. 한족총연합회는 1929년 봄 김좌진과 정신(鄭信)·민무(閔武)·김종진(金宗鎭) 등 민족주의 계열과 무정부주의적 성향의 인사들이 힘을 합해 조직하였다. 본부를 닝안현에 두었고, 주석으로 김좌진을 선출하였다. 김좌진은 농촌 자치조직을 강조하면서 그 일환으로 1929년 10월 자신의 자택 인근인 헤이룽장성 하이린시(海林市) 산스참(山市站)에 금성정미소를 설치 운영해 자치경제의 모범을 보였다. 그러나 1930년 1월 24일 오전 7시 정미소의 발동기가 정지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온 김좌진은 박상실(朴尙實)이 쏜 권총에 등을 맞고 순국하고 말았다. 박상실은 당시 20세 가량의 청년으로 금성정미소에 위장취업한 후 때를 엿보다가 김좌진을 암살하고 도주하였다고 한다. 암살사건 직후에 충격을 받아서 박상실을 일제의 밀정으로 판단하였다. 위장취업 당시 박상실은 김인환이라는 가명을 썼고, 암살 직전에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에 체포된 후 무혐의로 풀려난 전력이 있어 김좌진을 암살하라는 일제의 지령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한 것이다. 이에 김수산(金壽山) 등과 함께 6명의 결사대를 조직해 5월 1일, 이른바 ‘메이데이May day’를 기하여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을 습격하기로 결의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5월 1일을 기하여 한국인들이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을 습격하였는데, 이 사건의 정황과 복수 계획이 일정상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거사를 준비하기 위해 5인의 동지와 함께 헤이룽장성 주허현(珠河縣, 현 상즈시(尙志市)) 우지미역(烏吉密驛)에 위치한 외딴 농가에서 권총 3정을 마련하는 등의 준비 작업을 벌였다. 함께 거사를 돕던 오항선(吳恒善)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결사대는 6명의 남자였고, 김수산과 함께 포함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준비 도중에 밀고자가 발생해 결사대원들은 도주하였고, 이후에 체포되었다고 한다. 결국 이들의 김좌진 암살 복수전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지만 1930년 5월 1일에는 한국인 50여 명이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을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나 이들의 계획이 이 사건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때 이 사건을 계기로 32명의 한국인이 중국 관헌에게 체포되었고, 일본군은 계엄령을 선포한 후 기마부대 1개 대대를 파견할 정도로 사건을 엄중하게 처리하였다. 그래서인지 체포된 뒤 가혹한 고문을 받은 끝에 3년여의 수감 생활을 하다 순국하였다. 한 가지 이채로운 사실은 1931년 9월을 전후해 김좌진을 암살한 박상실이 체포되었고, 수감 중 박상실의 얼굴을 직접 확인해준 것이다. 그 결과 박상실은 헤이룽장성 아청현(阿城縣)에 주둔 중이던 중국 호로군(護路軍) 총사령부에 체포된 후 처형되었다. 결과적으로 옥중에서나마 김좌진의 암살에 대한 복수를 해낸 셈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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