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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찬

鄭奇贊

1880 ~ 1910.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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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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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알아보는 인물 · 정기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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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보성(寶城)의병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남도 보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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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안규홍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독립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90) 전라남도 보성군(寶城郡) 봉덕면(鳳德面) 마치동(馬峙洞)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910년 재판 당시 31세이므로 1880년생으로 추정된다. 이명으로 한자를 달리한 정기찬((鄭基贊)·(鄭基燦))과 정광서(鄭光瑞)를 썼다. 안규홍(安圭洪)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의병활동을 하였다. 안규홍 의병장은 같은 전남 보성군 태생의 의병장으로, 안규태(安圭泰)·안계홍(安桂洪)·안진사(安進士) 등 여러 이명을 가졌으며, 머슴 출신이라 ‘안담살이’로 불리기도 하였다. 안규홍은 1908년 2월 강성인(姜性仁)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다가 강성인이 의병활동을 빌미로 주민들에게 민폐를 끼치자 강성인을 처단하고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보성 일대를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1908년 2월 파청대첩(巴靑大捷), 8월 진산대첩(眞山大捷), 1909년 3월 원봉대첩(圓峰大捷)을 승리로 이끄는 등 전남 지역의 대표적인 평민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안규홍이 의병부대를 구성한지 얼마 되지 않은 1908년 2월 즈음에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의병부대에서는 포군십장(砲軍什長)·기군장(起軍將) 등의 보직을 맡아 안규홍의 부장으로서 보좌하며 1909년 9월까지 전남 보성·순천(順天)·장흥(長興) 등지에서 주로 친일파들을 처단하는 활동을 하였다. 안규홍 의병부대는 초기에 승전을 바탕으로 기세를 올렸으나 1909년 들어서는 일제의 탄압에 의병활동에 점차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대해 의병부대에서는 정보를 밀고하는 친일파 때문으로 진단하고 적극적으로 친일파를 처단하기로 목표를 정하였는데, 여기에 투입되어 활약하였다. 1909년 5월 초순경 안규홍의 지휘 아래 동료 의병 40명과 함께 보성군 봉덕면(鳳德面) 법화촌(法化村)에 사는 일진회원 염영화(廉永化)를 체포하여 총살로 처단하였다. 같은 해 9월 4일에는 안규홍의 명을 받아 동료 의병 손덕오(孫德五)·염인서(廉仁瑞)와 함께 순천군 낙서면(洛西面) 상고리(上古里) 주막에서 일진회원 이용서(李用西)를 체포하여 처단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안규홍 의병부대에 소속되어 활발한 활동을 하였으나 부대는 1909년 9월부터 진행된 일제의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에 의해 더 이상 의병활동을 전개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의병부대는 자진 해산되었다. 해산 이후에도 일제의 추격은 이어져 고향으로 돌아가던 안규홍은 9월 25일 보성군 봉덕면 법화촌에서 체포되었으며, 이때 다른 부장들과 함께 붙잡혀 1910년 3월 29일 광주지방재판소서 교수형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지만, 같은 해 6월 2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었다. 재차 상고하였으나, 그해 6월 21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최종 형이 확정되었다. 1910년 7월 18일 대구감옥서(大邱監獄署)에서 형 집행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노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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