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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맹도

鄭孟道

1884 ~ 1908.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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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정맹도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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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의병

관련 단체

  • · 고광순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2004)

관련 사건

  • · 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04) 기록에 따르면 1908년 당시 25세이므로 1884년생으로 추정된다. 자료의 한계로 출신지는 알 수 없다. 거주지는 경상남도 하동군(河東郡) 화개하면(花開下面) 봉황대촌(鳳凰坮村)이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지리산 일대의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외교권 박탈로 인해 일제의 침략 야욕이 분명해지면서 전국적인 의병 봉기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1906년경 최익현(崔益鉉)은 기우만(奇宇萬) 등을 통해 남원·구례 등 섬진강 일대에서의 의병 봉기를 촉구하였다. 기우만·백낙구(白樂九) 등과 의병을 모의하였던 고광순(高光洵)이 1907년 1월 24일 담양군(潭陽郡)에서 봉기하였고, 전라남도 일대를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이들은 양한규(梁漢圭) 등과 남원성을 공격하였으며, 같은 해 5월 이후에는 지리산(智異山)을 중심으로 활약하던 김동신(金東臣) 의병과 연합하여 인근인 영남 지역으로 활동무대를 확대하면서 함양군(咸陽郡)·하동군 등에서도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이들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1907년 9월경 고광순이 구례에서 전사하고, 같은 달 중순 김동신 의병부대도 전북으로 활동지를 옮겼다. 의병부대 지휘부의 전사와 이동으로 인해 사기가 저하된 의병 중에는 투항자가 상당하였다. 하지만 귀순 후 교부받은 면죄문빙(免罪文憑)을 이용하거나 혹은 타인에게 증여하고 항일활동을 하는 인물도 있었다. 1908년 2월 14일 귀순한 후 하동군수로부터 면죄문빙을 발급받고 근신 중에 있었으나, 의병부대와 접촉하고 항일전선에 다시 투신하였다. 같은 해 3월 하순 다시 의병과 접촉한다는 소문을 입수한 하동주재소 순사들이 그해 4월 초순 집으로 찾아와 수색하였다. 하지만 평소 주도면밀하게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 순사들이 별다른 증거를 찾아내지 못하고 결국 철수하였다. 한편, 같은 해 5월 19일 가토(加藤) 소위가 이끄는 일본군 진주수비대 일행이 하동군 화개상면(花開上面)을 거쳐 오전 12시경 화개하면 원동(院洞)으로 들어와 하동읍으로 귀환하다가 강 맞은편인 광양군 다압면(多鴨面) 방면에서 의병의 발포를 받고 교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이미 의병부대에 합류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료들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교전하다가 적의 총격에 맞고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 이때 다른 의병들은 다행히 후퇴할 수 있었으나 시신조차 수습되지 못하였고, 일본군이 현장에 남겨진 시신을 통해 신원을 확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구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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