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轅益
鄭轅益1885. 9. 27 ~ 1955. 7. 3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02)
관련 사건
- · 1919년 의령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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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포장(2002) 1885년 9월 27일 경상남도 의령군(宜寧郡) 의령면(宜寧面) 동동(東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4~15일 의령군 의령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4일 의령면 만세시위는 의령군 만세운동을 알리는 시작이었다. 구여순(具汝淳)이 상경하여 서울 만세운동을 경험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내려와 동지들을 규합 후 거사를 제안한 것이 계기였다. 최정학(崔正學)·정용식(鄭容軾)·이우식(李祐植)·김봉연(金琫淵) 등과 함께 주도인물로 참여하였다. 거사일은 의령면 읍내 장날인 3월 14일로 결정하고 사전준비를 하였다. 태극기 제작과 독립선언서 등사 등의 시위 도구 준비, 군중 동원을 위한 각 지역별 연락 등 역할 분담을 하였다. 독립선언서 등사는 용덕면(龍德面) 면장 강제형(姜齊馨)의 협조를 받아 면사무소 등사판과 원지를 이용하여 수백 장을 확보할 수 있었다. 3월 14일 구여순·최정학 등과 함께 의령면 읍내로 나갔다. 장날로 군중이 가장 많이 모이는 시간인 오후 2시경, 읍내 의령 향교 앞에서 시위 주도자들이 연설하는 것으로 만세시위의 시작을 알렸다. 구여순·남호섭(南灝燮)·정봉균(鄭奉均)에 이어 단상에 올라 일제의 식민 지배를 규탄하고, 독립의 당위성과 이를 위한 만세시위 참여를 독려하는 연설을 하였다. 연단을 내려와서는 다른 시위 주도자들과 함께 모여든 군중에게 준비한 독립선언서과 태극기 등을 나누어주었다. 이억근(李億根)을 마지막으로 시위 주도자들의 연설이 끝나자, 함께 ‘독립만세’를 선창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시위가 전개되었다. 모여든 군중이 ‘만세’를 따라 부르며 호응하면서 자연스럽게 시위대가 형성되었다. 시위대를 이끌고 선두에서 ‘만세’를 부르며 읍내 장터와 중심가를 행진하였고, 일제 식민지배의 억압과 수탈의 상징인 군청, 경찰관 주재소 등으로 나아갔다. 3월 15일 만세시위가 이어졌다. 전날과 같은 방식으로 의령향교 앞에서 독립의 당위성과 시위 참가를 독려하는 연설을 하였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 1,500여 명이 모여서 시위대를 형성하였다. 최정학·구여순 등과 함께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대를 이끌었다. 읍내 중심가와 경찰주재소, 군청을 향해 행진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15일 만세시위가 계속되자 일제 군경이 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위해 마산의 일본군 포병대까지 급파되었다. 그 결과 시위 주도 혐의로 붙잡힌 인원만 100명이 넘었다. 이때 구여순 등 시위 주도층과 함께 붙잡혔다. 이후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4월 26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징역 10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7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형이 확정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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