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鄭在哲

鄭在哲

1879 ~ 미상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鄭在哲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평남 평양(平壤)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평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7)

관련 사건

  • · 1919년 평양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07) 평안남도 평양부(平壤府) 계리(鷄里)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919년 당시 41세이므로 1879년생으로 추정된다. 고향에서 소가죽중개업(牛皮仲介業)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1일~3월 3일에 걸쳐 평양에서 거행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평양의 만세시위는 서울의 만세운동과 동시에 준비되어 실행되었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이승훈(李昇薰)은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평양 일대의 만세운동을 조직하는 데 힘썼다. 그 결과 평양에서는 3월 1일 서울과 같은 시각에 장로교(長老敎)·감리교(監理敎)·천도교(天道敎)가 각각 독립선언식을 열기로 결정되었다. 3월 1일 오후 1시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 남산현교회(南山峴敎會), 설암리 천도교구당(天道敎區堂)에는 각기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각각의 시위대는 곧 남문 거리에서 합류하여 독립만세를 외쳤고, 독립선언서가 각 집에도 배포되었다. 이 과정에서 독립선언서를 발견해 읽고 동감하여 집 부근에서 시위대에 합류해 함께 만세를 외치며 남문의 평양경찰서까지 행진하였다. 이어 시위대는 일본인 신시가(新市街)를 거쳐 도청·재판소·평양역을 지났고, 다른 일부는 평양부청(平壤府廳)·평양형무소 등을 거치며 만세를 불렀다. 3월 2일부터 일제 헌병의 검거가 시작되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3월 3일 대학(大學) 운동장에서 만세시위가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여기에도 참여하였다. 모인 장소에는 수백 명의 시위대가 있었으나, 이미 경찰이 배치되어 폭력을 행사하며 해산시키려 하였다. 이때 구타를 당하면서도 대한독립만세를 끝까지 외치다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이 일로 평양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여 1919년 4월 29일 평양복심법원에서 형이 감경되어 징역 6월을 받았다. 재차 상고하였으나, 그해 5월 29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