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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周奉

鄭周奉

1901. 2. 8 ~ 1959.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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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鄭周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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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양산(梁山)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양산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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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04)

관련 사건

  • · 1919년 양산군 양산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2004) 1901년 2월 8일 경상남도 양산군(梁山郡) 양산면(梁山面) 중부동(中部洞)에서 태어났다. 만세운동 당시 양산군청(梁山郡廳) 직원으로 근무하였다. 1919년 3월 27일 양산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3일 동래읍(東萊邑) 장날에 동래고보(東萊高普)에 재학 중이었던 엄진영(嚴進永)과 김귀룡(金貴龍)이 중심이 되어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그날 시위에는 양산에 거주하는 엄주태(嚴柱泰)가 참여하였다가 독립선언서, 공약서, 경고문 등의 문서를 입수해서 양산으로 돌아갔다. 3월 14일 엄주태는 양산공립보통학교에서 전병건(全秉健)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그들은 양산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그들은 양산읍 만세시위를 함께 주도할 인사들을 규합하기 시작하였다. 그 과정에서 박삼도(朴三道)·이기주(李基珠) 등이 만세시위 계획에 참여하였다. 그들은 3월 27일 양산면 장날에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심하였다. 3월 17일 밤 9시에 양산군청에서 엄주태·전병건과 만났고, 양산군청의 등사기를 이용해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해 줄 것을 부탁받았다. 이에 독립선언서 50장을 등사해서 전달하였다. 3월 25일 오후 5시에는 엄주태·박삼도·이귀수(李貴守)에게 양산군청 등사기를 전달해 주었다. 이 덕분에 중부동의 엄주태 집에서 독립선언서 500장과 공약서, 경고문이 등사될 수 있었다. 3월 27일 오후 1시 30분경 엄주태·전병건·박삼도·이귀수와 함께 장터에 나온 군중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독립만세(獨立萬歲)’가 적혀 있는 큰 깃발을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면서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시위대를 이끌고 양산 일대를 행진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지만, 일제 군경이 시위대를 향해서 무력 진압을 전개하면서 시위주도자와 참여자를 연행하였다. 일제 군경의 무력 대응에 분노한 군중은 양산헌병분견소와 양산군청으로 갔다. 시위대는 일제 헌병의 무력적인 해산 시도에 굴하지 않았다. 부산에서 12명의 헌병이 증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위는 계속되었다. 결국 양산 헌병분견소장은 연행된 인사들을 풀어주면서 시위대의 해산을 요구하였다. 따라서 시위대는 시위를 멈추고 해산하였다. 하지만 일제 군경은 3월 28일 아침부터 양산면 만세시위에 참여한 인사들을 일제히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그 과정에서 엄주태·전병건·박삼도·안덕원(安德元)·강재호(姜存鎬)·전병한(全秉翰)과 함께 일제 군경에 붙잡혔다. 1919년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고, 그해 5월 2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은 취소되었으나 동일한 형량인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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