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賢秀
鄭賢秀1899. 9. 10 ~ 1951. 1. 17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연천군 백학면‧미산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9년 9월 10일 경기도 연천군(漣川郡) 왕징면(旺澄面) 동중리(東中里)의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21일 미산면(嵋山面) 석장리(石墻里)의 조우식(趙愚植)과 함께 백학면(白鶴面)과 미산면에서 거행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조우식은 고종의 국장을 다녀온 것을 계기로 전국적인 만세운동을 파악하고, 그 취지에 동의하여 고향에서도 만세시위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조우식은 많은 주민들이 장터에 나올 것임을 예상하여 백학면의 면소재지인 두일리(斗日里)의 장날인 3월 21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3월 21일 두일리 장터에서 조우식이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 모습을 보고 그 취지에 공감하여 구금용(具今龍)·이낙주(李洛周)·홍순겸(洪淳謙)·김복동(金復東)·한상혁(韓相赫)·김문유(金文裕) 등과 함께 곧바로 만세시위에 동참하였다. 이어서 시위대와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자, 이에 호응한 주민들이 참여하면서 시위대의 규모는 100여 명으로 확대되었다. 이에 장터를 순시하던 일제 헌병은 즉각 해산할 것을 명령했으나, 시위대와 함께 이를 무시하고 계속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대의 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조우식·구금용·이낙주·홍순겸·김복동·한상혁·김문유 등과 함께 만세시위 지휘부를 구성하였다. 이들과 만세시위의 방향을 논의한 끝에 백학면의 면장 윤규영(尹圭榮)을 만세시위에 합류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시위대를 지휘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면사무소로 행진하였다. 면사무소에서 시위가 전개되는 가운데, 대표로 안으로 들어가 면장 윤규영을 끌고 와서 조선독립만세를 함께 외칠 것을 요구하고 동참시켰다. 이에 시위대의 기세는 더욱 고조된 와중에 박영학(朴永鶴)과 함께 장터로 돌아가서 주민들에게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고, 이에 시위대의 규모는 2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시위대를 지휘하여 면사무소로 행진하였고, 면사무소 직원들도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면서기 정기만(鄭基萬)이 이러한 요구를 거부하자, 이에 분노한 시위대를 지휘하여 면사무소를 습격하였다. 시위대의 선두에서 면사무소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트리자, 다른 주민들도 적극 호응하여 면사무소를 향해 투석하여 시설과 집기를 파괴하였다. 이 날 밤 10시경 조우식 등 지휘부와 협의하여 200여 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조선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미산면 마전리(麻田里) 문묘(文廟)로 가서 다음날 새벽까지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석장리로 가는 도중 마전리 헌병주재소 앞에서 일제 헌병들의 무력 탄압에 의해 시위대는 해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우식·이낙주·홍순겸·김복동·백천기(白天基)·한상혁·김문유·구금용과 함께 붙잡혀 조사받은 후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와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고 7월 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 취소와 함께 다시 징역 2년을 받았다. 재차 상고하였지만 9월 18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었다. 이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