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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興敎

鄭興敎

1900. 8. 2 ~ 1965.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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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鄭興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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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가평(加平)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가평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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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900년 8월 2일 경기도 가평군(加平郡) 북면(北面) 목동리(沐洞里)의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정흥룡(鄭興龍)이 있다. 이 지역 서당의 훈장이자 구장(區長)이었던 이규봉(李圭鳳)의 문하에서 한학을 공부하여 수제자로 인정받았다. 이규봉은 가평 지역에 독립선언문을 전달한 인물이다. 이윤석(李胤錫)·장호형(張浩亨)·장기영(張基榮)·장호리(張浩利) 등과 함께 1919년 3월 15일 북면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가평의 만세운동은 천도교계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3월 15일 대대적인 만세시위와 다음날 16일의 구속자 석방을 위한 시위까지 2일에 걸쳐 전개되었다. 이규봉은 고종 장례식에 참례하는 과정에서 가평 출신의 천도교계 인사들로부터 독립선언서 2장과 『독립신문』 1부를 수령하여 3월 6일 귀향하였다. 이규봉으로부터 서울의 만세운동 상황, 가평 만세운동을 조직하라는 당부와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을 이규봉의 아들 이윤석과 함께 전달받고, 만세운동을 결의하였다. 이윤석과 논의하여 북면 내에서 서로 분담할 지역을 나누어 만세운동에 대한 여론조성과 거사를 함께 계획할 동지 규합에 노력하였다. 구체적으로 적목리(赤木里)·단녕리(湍寧里)·과대리(過大里)·백비리(柏比里)·도대리를 담당하였다. 동생인 정성교(鄭聖敎)와 장기영·장호형·장호리·이만석(李萬錫)·정재명(鄭在明)·최종화(崔宗和)·최용화(崔容和) 등 30여 명과 논의하여 가평 읍내의 장날인 3월 15일을 거사일로 결정하였다. 당일 아침 일찍 북면 면사무소 앞에서 모여 만세시위의 대열을 형성하고, 읍내의 가평군청으로 행진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후 많은 주민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이윤석과 함께 “세계 각국 공회(公會)에서 속국은 이번에 독립하게 되었다. 그러니 조선도 역시 독립할 것이므로 3월 15일 아침 9시 가평에서도 조선독립만세를 외치자”라는 내용으로 「밀통(密通)」이라는 제목의 격문을 작성하여 북면 각 지역에 배포하였다. 이 「밀통」은 정기복(鄭基福)과 이만석·정재명 등을 통해 만세운동 하루 전인 3월 14일 목동리·화악리(華岳里)·소법리 등 가평군 북면 내의 각 지역에 일제히 배포, 혹은 구두로 전달하여 주민들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3월 15일 아침 이윤석·장호형·장기영·장호리 등과 함께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북면사무소로 나갔다. 만세운동에 공감하여 참여를 결의한 많은 주민들이 면사무소 앞에 나와 있었다. 이윤석·장기영·이만석·최종화(崔宗和) 등과 함께 10여 장의 태극기를 나눠 들고 흔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면사무소 앞에서 많은 주민들이 큰 목소리로 따라 외치며 호응하였다. 동지들과 함께 주민들을 지휘하여 시위대열을 갖추고, 선두에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가평군청으로 행진하였다. 예상하지 못한 대규모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가평군수를 비롯한 군내 각 면장들과 가평헌병분견소의 일제 헌병 등 일제 관헌들이 총출동하여 만세시위의 즉각 해산을 명령하였다. 대규모 시위대는 일제 관헌들의 해산 명령에 맞서 더욱 격렬하게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지속하였다. 이러한 대규모 시위대의 위세에 눌린 일제 관헌들은 이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저녁 8시경 시위대가 해산하기 시작하자, 주도자들을 붙잡기 시작하였다. 만세시위의 주도자 중 한사람으로 파악되어 이윤석 등 10여 명과 함께 붙잡히게 되었다. 이후 북면에서는 장기영·장호형 등이 중심이 되어 붙잡힌 사람들의 석방을 위한 투쟁이 다음날까지 전개되었으나, 풀려나지 못하였다. 1919년 4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및 소요죄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7월 1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본인의 행위는 조선민족으로서 정의, 인도에 기초한 의사발동으로 범죄가 아니기 때문에 제1심, 제2심의 유죄판결은 부당”며 상고하였지만, 9월 25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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