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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興祚

鄭興祚

1889. 12. 28 ~ 1964.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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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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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남해(南海)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남해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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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9년 12월 18일 경상남도 남해군(南海郡) 설천면(雪川面) 진목리(眞木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4일 남해군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남해군의 만세운동은 하동군(河東郡) 민족주의 인사들이 들어와 일으킨 3월 20일 남해 읍내 시위가 최초이다. 그리고 고현면(古縣面), 설천면(雪川面), 남해면 읍내 시장을 중심으로 4월 초 집중적으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특히 4월 4일 읍내 장날을 맞아 일어난 만세시위는 매우 격렬한 양상을 보였다. 4월 4일 남해군 읍내 만세시위는 전날인 3일 설천면 남양리(南陽里) 만세시위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설천면에 거주하던 이예모(李禮模)가 하동군에 가서 그 지역 민족주의 인사들이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구해 온 것이 계기가 되었다. 정학순(鄭學淳)·윤주순(尹柱舜)·유찬숙(柳贊淑)·정순조(鄭順祚)·정몽호(鄭夢虎) 등과 함께 이예모 집에서 거사를 계획하였다. 4월 3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시위에 필요한 태극기 및 독립선언 전단 제작, 군중 동원을 위한 동리별 연락 등의 역할을 분담하여 은밀하게 준비를 진행하였다. 만세시위는 4월 3일 오후 3시 경부터 남양리에서 시작되었다. 정순조가 큰 태극기를 들고, 이예모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만세시위를 시작하고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불렀다. 그리고 시위대는 만세를 부르며 남해 읍내를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시위대는 고현면(古縣面)에 이르렀을 때 면장인 김치관(金致寬)이 남해경찰주재소에 시위 사실을 밀고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시위 주도자들이 상의한 결과, 장날인 4월 4일 읍내 시장에 다시 모여서 만세시위를 재개하기로 하고 해산하였다. 4월 4일 전날 시위 주도자들과 함께 읍내 시장에 도착하였다.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오후 2시경 준비해 간 큰 태극기를 장대 끝에 달아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읽은 후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자 전날 시위에 참가했던 사람들과 장날이라 군내 각지에서 모인 주민들이 동참하였다. 시위대의 선두에서 사람들과 함께 행진하며 만세를 불렀고, 식민지 지배의 상징적인 기관인 군청, 경찰관주재소, 금융조합 사무실, 우편국, 공립보통학교 등에 진입하여 유리창과 집기·기물 등을 파손하였다. 그리고 경찰관, 금융조합 직원 등을 끌고 나와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특히 군청에 들어가서는 시위대가 가득한 앞뜰에서 군수에게 독립만세를 외치도록 하였다. 만세시위의 열기는 시간이 갈수록 더 높아졌으나, 강제 해산을 위해 사천(泗川)경찰서 증원 병력이 도착한 이후 총검을 가지고 진압이 시작되면서 양상이 변하였다. 일제 경찰의 총칼 앞에 시위대는 흩어졌고, 대대적인 주도자 검거도 이어졌다. 이때 정순조·이예모 등 20명이 넘는 사람들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8월 7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소요죄와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진주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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