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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우

金吉友

1899. 3. 24 ~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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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길우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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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남 함흥(咸興)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남도 함흥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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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포상 정보

  • · 애족장(2009)

관련 사건

  • · 조선국내공작위원회사건(朝鮮國內工作委員會事件)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9) 1899년 3월 24일 함경남도 함흥부(咸興府) 운흥리(雲興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김춘식(金春植), 김성춘(金成春), 김도성(金島城, 金都成)을 사용하였다. 고향에서 사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함흥에서 곡물상을 하였다. 이후 간도(間島)로 이주하여 일용노동, 중국인 부호의 사병(私兵), 서점원, 농업, 곡물상 등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1925년 11월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해외지부 만주총국(滿洲總局)을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1926년 5월 지린성(吉林省) 위사현(韋沙縣) 일면파(一面坡)에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설립되었다. 이어서 간도와 남북만(南北滿) 각지에는 만주총국 하부조직들이 만들어졌고 이를 중심으로 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이후 1928년 코민테른 제6차 대회에서 발표된 「12월테제」에 따라 조선공산당이 코민테른 지부로서의 지위를 잃게 되자 만주의 조선공산주의자들은 향후 항일운동의 방향을 두고 고민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부 공산주의자들은 1929년 6월 지린성 둔화현(敦化縣)에서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조선공산당재건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에서는 한반도에 조직원을 파견하여 전국적으로 하부조직을 두고자 하였다. 파견된 조직원은 노동자들을 규합하여 노동운동을 전개하며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1월 간도의 룽징(龍井)에서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남세극(南世極)·김자성(金自成) 등과 함께 여남수(呂南壽)를 책임자로 하는 용정 제4야체이카에 소속되었다. 야체이카ячéйка는 러시아어로 사회주의 활동가들의 기초 조직 단위를 말한다. 1929년 1월 돈화현 황니하자(黃泥河子)로 이동하였고, 2월 상순경에는 방정구(方正球)·허용(許湧)과 함께 허문덕(許文德)을 책임자로 하는 황니하자야체이카에 소속되었다. 이후 5월에 황니하자야체이카는 조직 구성이 바뀌어 방정구·허용이 탈퇴하고 새롭게 한(韓)모와 박원진(朴元鎭)이 참가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야체이카 회의를 개최하고 해당지역에서 농민동맹을 조직하여 활동하기로 하였다. 당시 농민동맹 조직은 조선공산당재건운동의 일환이었다. 이 무렵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가 조직되자 여기에 참가하여 통신 연락을 담당하였다. 1930년 10월 함남 함주군(咸州郡) 흥남면(興南面) 송상리(松上里)로 이동하였다. 여기에서는 인쇄업에 종사하며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5월 일제 경찰에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던 중 1933년 3월부터 류마티스와 척수염으로 환자들을 수감하는 병감(病監)에 수용되었다. 7월 14일 옥중에서 병세가 악화되어 가족이 보석을 신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옥중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다른 자료에 의하면 1934년경 옥중에서 사망했다는 의견도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최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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