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信聖
趙信聖1873 ~ 1953. 5. 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조선부인회
- · 대한독립청년단
- · 근우회
- · 여성실업장려회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출신이다. 기록에 따르면 1921년 당시 48세이므로 1873년생으로 추정된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모와 함께 살다가 16세에 결혼하였지만, 22세에 남편을 잃었다. 1897년 기독교를 수용한 후, 24세에 상경하여 이화학당과 상동에 위치한 교원양성소를 졸업하고 인근 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였다. 28세부터 8년간 이학학당 사감을 하면서 조선부인회를 설립하고 활동하였다. 34세에 유학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후 간다(神田)성경학교를 졸업하였다. 이어서 요코하마(橫浜)성경학교 고등과에 들어갔지만, 건강악화로 학업을 그만두고 귀국하였다. 이후 부산 규범여중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1910년 사임하였고, 이후 안창호(安昌浩)의 주도로 설립된 평양(平壤)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1918년 말에는 중국 베이징(北京)을 다녀왔고, 1919년 만세운동에 연루되어 교장직을 사임하였다. 1920년에는 김봉규(金琫奎)·방임주(方壬柱)·안국정(安國汀) 등과 함께 평남 맹산(孟山)에서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을 결성하였다. 총책 김달규(金達奎)를 중심으로 독립사상 고취, 단원 모집, 친일파와 부일분자 응징, 유산계급에 대한 군자금 모금, 관공서 파괴와 관원 사살 등을 실행하는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같은 해 11월경 평남 영원경찰서(寧遠警察署)에 붙잡혔지만, 유치장에서도 순사들에게 조선독립운동에 힘쓰라고 설득하였다. 이 일로 결국 징역 2년 6월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1927년 12월 24일에는 박현숙(朴賢淑)·한영신(韓永信) 등과 함께 근우회(槿友會) 평양지회 준비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28년 1월 30일 박현숙·박승일(朴昇一) 등과 함께 봉건적 굴레에서 벗어나는 여성 자신의 해방과 일제 침략으로부터의 해방을 목표로 하는 근우회(槿友會) 평양지회를 조직하였다. 1929년 민족차별 교육에 반발한 광주학생운동(光州學生運動) 이후 연이은 여학생 시위사건으로 근우회 간부들이 대량 검거·구속되고 근우회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진 가운데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0년 12월에는 확대중앙집행위원회에서 제4대 중앙집행위원회가 결성될 때 평양지회의 대표이자 여성운동계의 원로로서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농촌여성의 계몽운동을 중심으로 근우회를 이끌었지만, 해소론이 대두됨에 따라 활동은 단기에 그쳤다. 1930년대 초 신간회와 근우회의 해소 등 일제의 탄압이 있었지만, 이후에도 여성의 경제적 자립과 권익 보호를 위한 활동에 앞장섰다. 1930년 12월 부녀실업자의 구직 활동을 돕고 메리야스 공장 등을 경영하여 조선여자의 경제적 진출을 도모하자는 목표를 가지고 부회장 최의경(崔儀敬)·서기 왕혜실(王惠實) 등과 더불어 여성실업장려회(女性失業奬勵會)를 설립한 후 회장으로 조직을 이끌었다. 1932년 9월에는 10여 명의 동지와 더불어 평양여자소비조합조직준비회(平壤女子消費組合組織準備會)를 개최하여 여성 주체의 경제기관 설립에 힘을 쏟았다. 또한 교육운동에도 참여하여 평남 대동군(大同郡) 대보면(大寶面)에서 조선고육원(朝鮮苦育院)을 운영하며, 취명학교(就明學校) 학생들을 중심으로 일거리를 주고 학비를 보조하였다. 1932년 6월에는 조선교육학교(朝鮮敎育學校)를 설립하여 청소년 교육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이른바 ‘무산아동교육기관(無産兒童敎育機關)’으로서 이름을 높이던 조선고육원이 평남도 학무과의 조사 명령을 받고 대동군수(大同郡守)로부터 인가 없는 강습소라 하여 폐쇄명령을 받는 등 민족교육 활동이 제약을 받기도 하였다. 1934년 남녀 구별 없이 여성에게도 의학을 습득할 기회를 주어 민족 보건을 증진하자는 목적에서 경성여자의학강습소(京城女子醫學講習所)가 설립되었다. 총독부가 의사검정시험을 철폐하려 하면서 위기에 처하자, 강습소를 재단법인 여자의학전문교(女子醫學專門校)로 전환하려는 기성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위원장 박영효(朴泳孝)·위원 길정희(吉貞姬) 등과 함께 준비위원으로 참여하였다. 같은 해 9월 17일에는 평양 각계 인사들의 발기로 회갑축하회(回甲祝賀會)를 개최하여 교육사업과 여성운동 등에 헌신한 삶을 치하하였다. 1935~1936년까지 평양의 교육·여성문제 등과 관련해 지속적으로 활동하였으며, 기부활동으로 존경을 받았다. 1945년 광복 이후 3개월 만에 월남하였고, 1대한부인회 부총재와 조선민주당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1953년 5월 5일 6.25 전쟁 중 부산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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