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銀石
趙銀石1906. 6. 20 ~ 1956. 7. 3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신우동맹
- · 혁우동맹
- · 적우동맹
- · 우리동맹
포상 정보
- · 애족장(1998)
관련 사건
- · 대구학생결사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8) 1906년 6월 20일 경상북도 달성군(達城郡) 가창면(嘉昌面) 우록리(友鹿里)에서 태어났다. 활동 당시에는 대구부(大邱府) 남산정(南山町)에 거주하였다. 이명은 조연하(趙然何)이다. 1927년부터 혁우동맹(革友同盟)·적우동맹(赤友同盟)·우리동맹 등에 참여하였고, 1928년에는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의 동맹휴학을 주도하였다. 1927년 12월 10일 대구고보에 다니면서 윤장혁(尹章赫)·상술상(尙戌床)·박득룡(朴得龍)·백대윤(白大潤)·김낙형(金洛衡) 등과 함께 대구부 남산동(南山洞) 백대윤의 집에서 고려공산청년회 경상북도 책임자 장홍상(張弘相)과 단체 조직을 논의하였다. 이들과 함께 마르크스주의적 혁명전술의 함양을 도모하고 피압박 민족의 해방운동을 전개한다는 목적으로 비밀결사 신우동맹(新友同盟)을 조직하였다. 당수(黨首)에 장홍상·책임비서에 윤장혁을 선출하고, 백대륜 등과 함께 중앙집행위원으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맹원을 3개 그룹으로 나눈 후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기 위하여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하고, 그 내용을 알리기 위하여 대구 시내에 있는 각 학교별로 선전위원을 두기로 하였다. 이때 제2그룹 책임자와 대구 교남학교의 선전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하지만 회원이 증가함에 따라 일제 경찰에게 발각될 위험이 커진다고 판단하여 백대윤의 집에서 동맹을 해산하였다. 같은 해 12월 14~15일 윤장혁·장종환(張鍾煥)·권태호(權泰鎬) 등은 장종환의 집에서 다시 비밀결사 혁우동맹을 조직하고, 스스로 책임자가 되어 정원 5명의 야체이카(세포조직)를 조직하기로 하였다. 1928년 1월 하순 윤장혁이 야체이카를 조직할 때 상술상·박득룡과 함께 회원이 되었고, 2월 중순 중앙간부와 야체이카 회원들이 동맹의 해산을 논의할 때 자택을 모임 장소로 제공하였다. 그해 2월 26일 윤장혁·상술상·장종환·박득룡 등과 함께 상술상의 집에 모여 비밀결사 적우동맹을 조직하고 7개 부서 가운데 조직부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4월 22일 조직 개편과정에서 이미 3월에 학교를 졸업하였기 때문에 학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피선거권이 없는 특별회원으로 변경되었다. 이후 적우동맹은 내분 발생으로 해산하였다. 같은 해 9월 8일 상술상·이덕주(李德周)·김영수(金永壽)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우리동맹’을 결성하고, 조사연구부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여러 차례 집회를 열어 공산주의에 대한 토의·연구·선전 등을 실행하였다. 또한 9월 26일 대구고보에서 시도한 동맹휴교가 실패하자 학생들과 더불어 제2차 맹휴 계획을 수립하고 10월 15일 실행하였다. 이후 신우동맹·혁우동맹·적우동맹 등에서 함께 활동하던 사람들을 포함해 대구공보 동맹휴교를 주도했던 학생들과 함께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당시에는 이 일이 ‘대구학생결사사건’으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1929년 10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항소하였다. 1930년 3월 1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미결구류일수 중 3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광복 후인 1945년 10월 대구달성연합 농민조합협의회 결성에 참여하고 선전부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어서 전국농민조합 경상북도연맹의 결성에도 참여하고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12월에 열린 전국 농민조합총연맹 결성대회에 대구 대표로 참석하기도 하였다. 1946년 4월 민주주의민족전선 달성군 지부에 참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최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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