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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泰鎭

丁泰鎭

1904. 7. 25 ~ 1952.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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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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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교하(交河)문화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교하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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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조선어학회

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관련 사건

  • · 조선어학회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2) 1904년 7월 25일 경기도 교하군(交河郡) 아동면(衙洞面) 금릉리(金陵里, 현 파주시 금촌동)에서 개신교도인 아버지 정규원과 어머니 죽산 박씨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호는 석인(石人)이다. 1917년 4월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4년 과정을 수학한 후 1921년 3월 졸업하였다. 이어서 같은 해 4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한 후 1925년 3월 학업을 마쳤다. 재학 시절 6살 위의 동기 동창생인 정인승(鄭寅承)을 만나 국어를 중심으로 한 문화운동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1925년 4월 함경남도 함흥군(咸興郡)에 있는 영생고등보통여학교 교원으로 취임하여 영어와 조선어 교육을 맡았다. 1927년 5월 미국 유학길에 올라 우스터대학(Wooster College)에 입학해 철학을 공부하였다. 1930년 6월에는 컬럼비아대학 대학원에 들어가 교육학을 전공하였다. 1931년 6월 학위를 취득하고 같은 해 9월 귀국한 후 영생고등보통여학교의 교무주임으로 복직하였다. 교사로 재직하면서 우리말을 보존하고자 방언(方言) 수집에 전념하였다. 학생들에게 곧고 단단한 학자로 존경받으며, ‘돌부처’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학생들에게는 자주 “너희들끼리는 한국말만 써야 한다. 너희들이 아름다운 조선말을 안 쓰면 얼마 안 가서 조선말과 민족은 이 지구상에서 영영 사라지고 말게 된다.”라고 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아울러 수업 시간을 통해 임진왜란 당시 전라남도 남원(南原)에서 남장(男裝)을 하고 왜군과 싸운 김홍도(金紅桃)와 왜장을 껴안고 대동강에 뛰어든 평양 기생 계월향(桂月香) 등의 일화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또한 과거에 조선은 일본보다 문화가 발전하였다는 사실과 조선 민족은 파벌 투쟁이란 폐습을 고쳐 자유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 등을 교육하였다. 1941년 5월 영생고등보통여학교를 사직하고,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 전임위원으로 있던 정인승의 권유로 조선어사전 편찬 전임위원이 되어 1942년 8월까지 사전편찬에 참여하였다. 1942년 8월 말경 함경남도 홍원(洪原)경찰서에서 ‘치안유지법 피의사건의 증인으로 9월 5일에 출두하라’는 내용의 소환장을 받고, 같은 해 9월 출두하였다. 조사과정에서 일제 경찰은 증인이 아닌 피의자로 다루며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자들의 집단체’라는 자백을 받아 내려고 추궁과 고문을 가하였다. 20여 일의 고문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교단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자들의 집단체인 점을 인정하고 말았다. 이를 근거로 일제 경찰은 1942년 10월부터 조선어학회 주요 인사들을 대거 체포하였다. 홍원경찰서에 수감되었을 때 부친상을 당하자, ‘망국의 한도 서럽다하거늘 아버지 또한 돌아가시니 / 망망한 하늘 아래 어디로 가자는 말인고? / 한 조각 외로운 혼이 죽지 않고 남아 있어 / 밤마다 꿈에 들어 남쪽으로 돌아가네.’ 라는 옥중시(獄中詩) 「홍원에서」를 통해 소회를 피력하였다. 1944년 9월 20일에는 일제 예심판사에 의해 이른바 치안유지법의 결사 목적 수행 행위죄가 적용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일제는 영생고등보통여학교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주입하고,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어학회에 들어가 조선어사전 편찬에 종사한 점을 문제삼았다. 이 일로 1945년 1월 15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받아 옥고를 겪다가, 그해 7월 1일 풀려났다. 광복 후에는 미국 유학 경험을 바탕으로 미군정청(美軍政廳)의 고위관료로 제안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조선어학회를 재건해 ‘조선말 큰사전’ 편찬 업무에 집중하였다. 아울러 연세대·중앙대·홍익대·동국대 등을 출강하며 국어학 등을 강의하였다. 1946년부터는 『한자 안쓰기 문제』·『중등국어독본』·시집 『아름다운 강산』·『고어독본(古語讀本)』 등을 출판하였다. 아울러 1948년 9월 조선어학회에서 6개월 과정으로 설립한 세종중등국어교사양성소 등에서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특히 조선어학회의 『조선말 큰사전』 편찬 사업에 헌신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1947년 10월 9일 한글날에 발행된 『조선말 큰사전』 제1권, 1948년 5월 5일 『조선말 큰사전』 제2권의 편찬을 주도하였다. 같은 해 3월 20일에는 일본의 오사카 학무국이 재일동포 교육기관에서 한국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자, 이에 대한 항의의 글을 『조선중앙일보』에 게재하였다. 1948년 12월 김병제(金炳濟)와 함께 『조선고어방언사전(朝鮮古語方言辭典)』을 펴냈다. 1949년 9월 25일 조선어학회를 한글학회로 개편할 때 이사로 선임되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고향인 파주로 피신하였다가, 1951년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하였다. 그러다가 『조선말 큰사전』 편찬사업을 위해 1952년 5월 25일 다시 서울로 상경하였고, 같은 해 10월 28일 『조선말 큰사전』 제4권의 지형을 떠 놓았다. 하지만 그해 11월 2일 파주로 식량을 구하러 가다가 타고 가던 군용트럭이 전복되어 사망하였다. 조선어학회는 같은 해 11월 30일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강당에서 추모식을 거행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류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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