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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贊敬

鄭贊敬

미상 ~ 190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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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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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한산(韓山)의병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한산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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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정찬경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200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03) 충청남도 한산군(韓山郡) 북부면(北部面) 죽동(竹洞) 출신이다. 자료의 한계로 출생시기는 알 수 없다. 충남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였다. 1905년의 외교권 상실과 1907년의 군대 해산으로 국권상실의 위기감과 의병의 군사적 능력을 증대시킬 양질적 조건이 마련되면서 정미의병(丁未義兵)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많은 지역 내의 인사들이 반상 및 빈부를 막론하고 의병 거병을 기획하는 상황이었다. 특히 충청 지역은 충북 내륙 지역에서 호좌의진(湖左義陣)으로 대표되는 대규모 의병세력이 거병하였고, 충남 연안-평야 지역은 비록 규모는 전자와 같지는 않았으나 삼남의 교차점이자 일제의 침략의 연결선인 경부연선(京釜沿線) 일대로서 작은 활동조차도 일제에게 상당한 경계와 위협을 줄 수 있었기에 여러 의병부대가 거병하여 활동하였다. 1907년 (음)2월경 향촌 내의 사람들을 찾아 시국을 개탄하고 “이때를 당하여 가만히 있을 수만 없고 조만간 어디에서나 만일 의병이 일어나거든 나를 따라 함께 참가함이 어떠한가?”라며 향촌민들에게 의병 거병 및 참여를 격려하였다. 같은 해 6월경 이와 같은 설득에 감화된 동향의 청년 김득수(金得洙) 등이 권총을 구하여 의병부대에 참여하고자 하다가 일제에게 붙잡히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거병을 위해 노력하다가 1908년경 40~50여 명의 동료를 모아 의병부대를 구성하고 본격적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의병부대의 가입을 권유하면서 스스로 의병대장을 자처하였던 이력으로 미루어 해당 의병부대의 지도자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1908년 5월 20일 충남 서천군(舒川郡) 일대에서 군인을 징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서천군 황동리(黃洞里)와 유동리(油洞里)에서 군자금 30원 이상을 모집하였다. 같은 달 25일에는 임천군(林川郡)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서천군 은적리(隱寂里)로 이동 혹은 별대를 파견하여 10여 원을 징수하였고, 황동리에서 휴식을 취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자신들의 주요 연락선인 경부연선에 대한 의병 공격에 주력하여 충남 지역의 의병들은 1908년경 큰 피해를 입고 중단되는 경우가 상당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1908년 7월경 일본군 홍산수비대(鴻山守備隊)와 교전 중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배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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