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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愚植

趙愚植

1888. 12. 22 ~ 1937.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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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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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곡성(谷城)의병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남도 곡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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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최익현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중기의병(최익현 의병부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888년 12월 22일 전라남도 곡성군(谷城郡) 오곡면(梧谷面) 오지리(梧枝里)에서 태어났다. 「면암선생창의전말(勉菴先生倡義顚末)」의 동맹록(同盟錄)에 따르며 기사생(1869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는 금파(錦坡) 조용섭(趙龍燮)이고 어머니는 문화 유씨(文化 柳氏)이다. 본관은 순창(淳昌)이며, 자는 종안(宗顔)이고, 호는 성암(省菴)이다. 1906년 최익현(崔益鉉) 의병부대에서 활동하였다. 1906년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최익현 등과 함께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최익현은 같은 해 (음)4월 전북 태인(泰仁)에서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林炳贊)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후, 1,000여 명을 이끌고 전북 순창(淳昌)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하였다. 그러던 중 전주·남원의 진위대가 공격해 오자 최익현 의병장은 일본군과는 싸우되 동포와는 전투를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진위대의 후퇴를 권유하였다. 하지만 진위대는 최익현 의병부대를 공격하였고, 이로 인해 부대원 대부분이 흩어지게 되었다. 이때 끝까지 남아 최익현을 보좌하였지만, 결국 의병장을 포함한 10여 명과 함께 붙잡혀 전주 진위영으로 끌려갔다. 며칠 후 서울로 압송되어 일본군사령부에서 심문을 받고, 1906년 8월경 태(笞) 100도(度)를 받아 고초를 겪었다. 1907년 일본 쓰시마섬(對馬島)으로 유배되었던 최익현이 서거하자, 시신을 국내로 운구하는 일에 참여하였으며, 이후에는 문집 간행에 참여하였다. 또한 동향 출신으로 함께 의병활동을 펼친 조영선(趙泳善) 등과 협의해 최익현을 기리기 위해 오강사(梧岡社)를 건립하였다. 1921년 일제 경찰이 오강사에 모신 최익현의 영정 등을 압수하고 폐쇄시키자, 이에 강력히 항의하여 1922년 다시 복원하였다. 1937년 결국 일제에 의해 오강사가 훼철되자, 이에 항의하며 자결하였다. 1940년경 문집인 『성암집(省菴集)』이 석인본으로 간행되었다. 『성암집』의 서(書) 가운데에는 오강사 철거와 문집 압수 등에 대해 총독부에 항의하고 경찰서장에게 압수물품 반환을 요청하는 내용이 실려 있으며, 잡저의 「옥천일기」에는 1906년 태인 의거부터 감옥 출감까지의 내용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광복 이후 1946년 오강사가 복원되었고, 1954년 추가로 배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여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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