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인명사전 -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1889. 1. 7 ~ 1933. 3. 14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임시의정원
- · 군사통일회의
- · 한국독립당
포상 정보
- · 독립장(1986)
관련 사건
- · 국민대표회의
- · 민족유일당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86) 1889년 1월 7일 경상남도 동래(東萊)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날 때 경남 지역의 연락을 담당하면서 활약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일제 경찰에 쫓기게 되자 중국 베이징(北京)을 거쳐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 도착하자마자 4월 22일 대한민국 국회의원에 해당하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고, 7월에는 경상도 출신 의원이자 군무위원회 이사에 이어 법제위원을 지내며 1920년 2월까지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말부터 ‘위임통치설’의 책임을 물어 이승만(李承晩) 임시대통령을 비판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반대 세력이 베이징에 모이는 데 가담하였다. 1921년 4월 27일 베이징에 모인 박용만(朴容萬)을 비롯한 17명의 이름으로 발표된 「군사통일회의 선언」에 내지노동당(內地勞動黨, 또는 국내노동당) 대표로 서명하였다. 1922년 안창호(安昌浩)가 앞장서서 국민대표회의를 상하이에서 열자, 12월 상하이에 도착하여 이 회의에 ‘13도총간부’라는 이름으로 참가하였다. 1923년 1월 22일 대표자격심사위원 5인 중 한 사람으로 활약하고, 2월 8일 이진산(李震山)·김상덕(金尙德)과 함께 ‘선서’, ‘선언문’ 수정위원 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같은 해 5월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되자, 임시정부를 옹호하는 개조파로 활동하며 새로운 국가 수립을 선언한 창조파를 성토하는 데 합세하였다. 국민대표회의를 마친 뒤에는 임시정부에 적극 참가하였다. 박은식(朴殷植)이 제2대 임시대통령을 맡은 시기인 1924년 5월 법무총장 대리 겸 차장을 맡았고, 그해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노동총판(勞動總辦)을 지냈다. 이어서 대통령제가 내각책임제인 국무령제로 바뀌며 1926년 12월 김구(金九)가 국무령으로 선출되자, 재무부장관에 해당하는 재무장을 맡아 1930년 11월까지 만 4년 동안 임시정부의 재정을 책임졌다. 국무위원으로 활동하던 시기에 임시의정원 의원으로도 활약하였다. 1926년 민족유일당운동이 일어나자, 1927년 4월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韓國唯一獨立黨上海促成會)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민족유일당운동은 좌우 세력을 통합하여 오로지 하나의 최고기관인 정당을 만들어 독립운동을 펼쳐가자는 데 목표를 두었다. 이를 위해 1926년 10월 대독립당조직 북경촉성회에 이어, 이듬해 상하이에서도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가 조직된 것이다. 하지만 1929년 말에 좌파가 통합을 깨고 나가자 우파 세력은 1930년 1월 25일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임시정부의 유일 여당으로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상하이에서 이동녕·안창호 등 28명과 함께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가하였다. 그러던 중 병세가 악화하여 1933년 3월 14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인 진선푸로(金神父路)에 있던 광제의원(廣濟醫院)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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