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理彦
鄭彦1866. 1. 29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6)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6) 1866년 1월 29일 황해도 수안군(遂安郡) 대천면(大千面) 남정리(楠亭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천도교도이자 나무장수로서 3월 3일 수안군 수안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과 6개 북부 지역에서 만세운동이 일제히 일어났다. 만세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추진했던 천도교 중앙총부는 지방의 천도교구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수안천도교구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된 것은 3월 1일 저녁이었다. 곡산(谷山) 사람 이경섭(李景燮)이 천도교 중앙총부의 월보과장(月報課長) 이종일(李鍾一)에게 받은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면서 만세시위 추진을 독려하였다. 이에 자극을 받아 수안천도교구장 안봉하(安鳳河)를 비롯한 천도교 인사들은 3월 2일 모임을 갖고 그 자리에서 이튿날인 3월 3일에 수안면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날 오후 3시경 수안헌병분대 헌병들이 수안천도교구실을 급습해서 독립선언서를 압수하고 현장에 있었던 수안군 천도교 인사들을 체포하였다. 연행을 피한 이영철(李永喆)·홍석정(洪錫禎)·한청일(韓淸一) 등은 천도교인들을 규합하여 3월 3일에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재차 결의하였다. 3월 3일 새벽 6시부터 수안면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이영철·한청일·홍석정이 이끄는 시위대 130~140명은 수안면 일대를 행진하면서 ‘조선독립’을 외쳤다. 수안금융조합 앞에서 ‘조선독립’을 선언하는 이영철의 연설이 있은 후, 시위대는 수안헌병분대로 향하였다. 수안헌병분대에 도착한 시위대는 ‘조선독립’을 선언하면서 헌병분대의 즉각적인 퇴거를 요구하였다. 오전 11시경 이동욱(李東郁)과 오관옥(吳觀玉)은 수안면에 모인 100여 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조선독립’을 외치면서 수안헌병분대로 행진하였다. 시위대는 ‘조선독립’을 선언하면서 헌병분대의 퇴거를 요구하며 헌병분대 경내로 들어갔다. 경내에서 ‘조선독립’과 헌병대 퇴거를 외치자, 일제 헌병은 시위대를 향해 사격을 하였다. 일제의 사격 소식이 전해지자 홍석정·한청일·오관옥은 수안면에서 시위대를 규합하였다. 평소 독립을 열망하였던 바, 홍석정의 권유를 받고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오후 1시경 수안면에 모인 150여 명과 함께 ‘조선독립’을 외치면서 수안헌병분대로 진출하였다. 최명백(崔明白)·강몽락(康夢洛)·박정훈(朴貞薰)·이종섭(李宗燮)·김병령(金炳領)·양계은(梁啓殷)·김여진(金麗鎭)·김하경(金河京)과 함께 일제 헌병이 수안헌병분대 정문에 쳐 놓은 새끼줄을 뚫고 경내로 진입하였다. 그 후 헌병분대 경내 및 바깥을 오가면서 시위대를 독려하는 한편, ‘조선독립’을 선언하면서 헌병분대의 퇴거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일제 헌병은 시위대를 향해서 일제히 사격을 가하였다. 그로 인해 시위대를 이끌었던 홍석정 등이 사망하였다. 일제는 3월 4일부터 수안군 일대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한 인사들을 색출함과 동시에 시위의 확산을 차단하였다. 그 과정에서 일제 군경에 의해서 붙잡혔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경성지방법원을 관할재판소로 지정하였으나, 같은 해 8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공소를 수리하지 않았다. 결국 그해 1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로 징역 1년 3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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