池龍俊
池俊1894. 5. 7 ~ 1971. 10. 11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2)
관련 사건
- · 범어사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2) 1894년 5월 7일 경상남도 양산군(梁山郡) 상북면(上北面) 소토리(所土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부산 범어사(梵魚寺)에서 운영한 중등 학력기관인 지방학림(地方學林)의 학생이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일제히 일어났다. 1919년 2월 하순 경에 불교계를 대표해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던 한용운(韓龍雲)이 범어사를 방문하였다. 한용운은 범어사 주지 오성월(吳星月)을 필두로 범어사 관계자인 이담해(李湛海)·오이산(吳梨山)과 만남을 가졌다. 한용운이 서울로 돌아간 후, 오성월은 김법린(金法麟)·김영규(金永奎)·차상명(車相明)·김상기(金相琦)·김한기(金漢琦) 등 범어사 대표 7명을 3월 1일 서울의 만세시위에 파견하였다. 3월 4일 한용운의 지시를 받은 김법린이 독립선언서를 지참하고 범어사로 돌아왔다. 범어사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은 범어사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심하였다. 동래읍(東萊邑)에 거주하는 허영호(許永鎬)는 만세시위에 활용할 목적으로 독립선언서 1,000장과 대형 태극기 1장을 제작하였다. 김영규·차상명·김봉환·김상기·김한기는 3월 17일 범어사에서 운영하는 명정학교와 지방학림 졸업생 송별회를 앞두고 30~40명의 학생들로부터 만세시위에 참여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때 지방학림 생도로서 만세시위에 참여할 뜻을 밝혔다. 이어 학생들과 함께 시위에 배포할 격문을 제작하였다. 3월 17일 저녁 김영규는 졸업생 송별회에서 축사를 마친 후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송별회에 참석한 학생의 일원으로 범어사 승려 등 관계자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선리(仙里) 뒷산과 동래 향교 뒷산을 넘어 동래읍으로 진출을 시도하였다. 3월 18일 새벽 1시경 시위대의 일원으로 동래읍 복천동(福泉洞)에 있는 불교포교당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명정학교 학생 오계운(吳啓運)으로부터 만세시위의 계획을 들은 일제 군경이 불교포교당에 진입해서 시위 주도자 김영규를 비롯해 차상명·김상기·김한기 등을 연행하고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일제 군경의 시위대 해산에도 불구하고 3월 18일 밤에 이근우(李根雨)·김해관(金海管)·김재호(金在浩)·박재삼(朴在森)·신종기(申鍾驥)·윤상은(尹相殷)·박영환(朴永煥) 등과 함께 지방학림과 명정학교 학생들은 동래읍 서문(西門)에서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시위대는 동래시장을 거쳐서 남문(南門)까지 행진하고 해산하였다. 3월 19일 윤상은·허용호·이영우(李永雨)·황학동(黃鶴東) 등은 동래시장에서 독립사상을 담은 격문을 시장에 모인 군중에게 배포하였다. 이날 오후 5시경 학생 시위대 일부는 동래경찰서로 진출을 시도하였으며, 또 다른 학생시위대는 오후 6시경 동래읍 시장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를 주도하였다. 일제 군경은 동래읍 일대에서 시위를 주도한 명정학교 및 지방학림 학생들을 붙잡아 가기 시작하였고, 이때 동료들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4월 17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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