陳信愛
陳信愛1900. 7. 3 ~ 1930. 2. 23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광주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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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900년 7월 3일 전라남도 광양군(光陽郡) 다압면(多鴨面) 신원리(新院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무렵에는 전남 광주군 효천면(孝泉面) 양림리(楊林里)에 거주하면서 수피아여학교의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10일 광주군 광주 읍내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에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을 이끌고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되자, 광주에서도 김철(金鐵)·김강(金剛)·최병준(崔丙浚)·최한영(崔漢泳) 등의 주도 하에 만세운동이 계획되었다. 이때 수피아여학교의 교사로 만세운동 계획에 깊이 관여한 박애순(朴愛順)에 의하여 만세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박애순은 평소 학생들에게 『매일신보』에 게재된 민족자결주의에 대해 학생들에게 읽어주고 한국의 독립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동시에 김강과 긴밀히 연락하면서 수피아여학교 내에 독립선언서를 배부하고, 찬성하는 교사와 학생을 모으는 역할을 하였다. 이후 학생들에게 독립 정신을 고취하며 함께 시위에 나갈 것을 설득하였다. 1919년 3월 10일 오후 2시 30분이 되자 약속된 장소였던 광주 부동교(不動橋) 아래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박애순 및 수피아여학교 학생 20여 명과 함께 시위에 참여하였으며, 수피아여학교 학생 대열의 맨 뒤에 서서 학생들을 보호하면서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수백 명의 군중은 점점 늘어났으며, 양림동·북문(北門)·지산면(芝山面) 방면에서 출발한 시위대도 곧 합류하여 1,0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늘어났다. 이에 작은 시장을 출발하여 서문통(西門通)을 거쳐 우체국을 지나 구세군지부에 이르기까지 시내를 돌며 학생들과 함께 만세를 외쳤다. 초기에는 시위를 제지하지 못하던 일제 헌병들은 오후 5시경, 기마 헌병대 및 소방대, 재향군인회 소속의 전역 군인까지 동원하여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폭행하며 강제 해산시켰다. 이 때 박애순 및 수피아여학교 학생 몇몇과 함께 일제 헌병에 붙잡혀 심문을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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