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陳志燦

陳志燦

1855. 1. 23 ~ 미상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陳志燦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함남 풍산(豊山)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남도 풍산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12)

관련 사건

  • · 풍산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2012) 1855년 1월 23일 함경남도 풍산군(豊山郡) 안산면(安山面) 하지경리(下地境利)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14일 풍산군 풍산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 만세시위는 천도교인들이 중심이 되어서 진행되었다. 풍산읍 천도교 교구장 주병남(朱炳南)은 읍내 천도교도인 장세급(張世岌)·박인진(朴寅鎭)·주의락(朱義洛)·이학현 등과 함께 3월 14일 풍산읍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태극기 등을 제작하는 등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한편 3월 10일 풍산군 천도교도였던 맹시정(孟時楨)은 원포리(院浦里)에 위치한 김병식(金炳軾)의 집을 방문해서 강희준(姜熙俊)을 만났다. 그 만남에서 강희준은 천도교주 손병희(孫秉熙)를 비롯한 민족대표 33인이 주도해서 일어난 3월 1일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알려주었다. 그 후 맹시정은 3월 12일 하지경리에 위치한 천도교 전도교실에서 이계술(李啓述)을 만났다. 이계술에게 3월 14일 풍산읍 만세시위 계획을 전해들은 맹시정은 시위 참여를 결의하였다. 3월 14일 주병남을 비롯한 천도교 인사들이 풍산읍 천도교구실에 모였다. 맹시성은 하지경리의 호암(虎岩)에서 노원리(老院里)로 향하는 군중을 규합해서 풍산읍 천도교구당에 도착하였다. 천도교당에 모인 천도교인들은 독립을 염원하는 기도를 하였고, 김창선(金昌善)과 박인진은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때 시위대에 합류해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를 시작하였다. 일제 군경이 만세시위 소식을 듣고 풍산읍 천도교구실로 진입을 시도하였다. 일제 군경은 천도교당에 모인 시위대를 해산시키고자 했으나, 일제 군경의 시위 진압을 물리치고 풍산읍 일대에서 행진을 시작하였다. 시위대의 일원으로 헌병분견소까지 행진한 후, 그곳에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였다. 총칼과 몽둥이로 무장한 일제 헌병이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하고자 했지만, 격분한 시위대는 헌병분견소로 진입해서 무기를 탈취하고자 했으며 분견소 내 기물을 파손하였다. 이에 일제 헌병은 시위대를 향해서 사격을 개시하였으며, 그로 인해 시위대 2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1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일제 헌병의 무력 진압으로 오후 4시경 시위대와 함께 해산하였다. 3월 20일 안수면(安水面)의 한주호(韓周鎬)·김동규(金東奎) 등은 풍산읍 만세시위 당시 일제 헌병의 발포 소식을 듣고 이에 격분해서 100여 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평산리(平山里) 헌병주재소로 갔다. 그곳에 도착한 시위대는 풍산읍 시위에서 일제 헌병의 무력 진압을 강력하게 규탄하였다. 그후 시위대는 평산리에서 소산동(小山洞)으로 행진하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일제 군경에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7월 14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 죄와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에 벌금 30원을 받았다. 이에 항소한 결과, 같은 해 8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에 벌금 20원으로 감형받았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그해 10월 23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