車光恩
車光恩1898. 8. 14 ~ 1966. 3. 18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원산부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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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8년 8월 14일 함경남도 원산부(元山府) 광석동(廣石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한자가 다른 차광은(車廣恩)을 썼다. 부인 이성완(李誠完)은 1919년 배화여학교 교사로서 대한애국부인회의 결사장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가죽상인(革商)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1919년 3월 1일 원산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원산에서는 1919년 2월 말부터 만세시위를 위한 본격적인 준비가 진행되었다. 원산 상리교회(上里敎會) 담임목사 정춘수(鄭春洙)는 민족대표 33인으로 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시위를 추진하고 있었다. 정춘수는 원산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약종상을 하던 장로파 신자 이가순(李可順)에게 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시위 계획을 알려주면서 원산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자고 제안하였다. 정춘수의 제안에 적극 동조한 이가순은 서울에서 독립선언서가 도착하지 않자, 2월 26일 이순영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였다. 2월 28일 이가순이 장로파와 감리파 개신교 소속 인사들을 중심으로 진성여학교에서 주최한 모임에 참여하였다. 그날 모임에 참여한 함하은(咸河殷)·정연수(鄭延壽)·인이극(印利極)·김장석(金章錫)·차용운(車用運)·김기헌(金基憲)·이진구(李鎭九)와 함께 독립을 위해서 원산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자는 이가순의 권유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이어서 상동의 자택에서 이가순과 함께 등사기로 독립선언서 2,000장을 인쇄하였다. 한편 서울에서도 원산으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박희도(朴熙道)로부터 독립선언서 300장을 건네받은 오화영(吳華英)은 이를 곽명리(郭明里)에게 전달하였다. 2월 28일 밤 곽명리는 원산에 도착해서 정춘수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했으며, 정춘수는 이가순에게 경성에서 전달받은 독립선언서 300장을 건네주었다. 3월 1일 이가순은 독립선언서 50장을 각 기관에 보냈으며 광성학교 학생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었다. 3월 1일 오후 2시 원산리 시장에서 시작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가순과 이순영은 시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으며, 차용운·김기헌·함하은·정연수·인이극·김장석·이진구와 함께 원산리 시장에 모인 3,000여 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대의 일원으로 사람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원산 일대를 행진하였다. 오후 4시에는 악대를 선두로 하는 500여 명의 시위대가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일본인이 거주하는 시가지 일대를 행진하였다. 일제 당국은 원산 헌병대, 원산경찰서, 파출소 3개소, 소방부, 재향군회원 등을 동원해서 시위대를 해산시키고자 하였다. 일제 당국의 해산 조치로 시위대는 오후 6시 무렵 해산하였다. 이날 일제 군경은 시위에 참여한 30여 명의 인사들을 연행하였으며, 그 이후로도 3월 1일 원산리 시장 만세시위에 참여한 90여 명의 인사들을 체포하였다. 일제 군경에 의해서 3월 1일 원산 만세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붙잡혀서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9일 함흥지방법원 원산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해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5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일부 원판결이 취소되었지만 징역 1년 6월을 유지하였다. 이에 “만세시위는 조선민족으로서 정의인도에 근거하는 의사행위로서 죄가 아니며, 한국과 일본의 평등하지 않는 감정은 동양의 장래에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기에 행복한 진화를 원하는 사람에게 형벌을 받게 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면서 상고하였으나. 1919년 7월 3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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