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약수
姜若秀1910. 12. 3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조선학생회
- · 경성도시학생협의회
포상 정보
- · 애족장(2018)
관련 사건
- · 경성제대반제동맹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8) 1910년 12월 3일 충청남도 아산군(牙山郡, 현 아산시) 인주면(仁州面) 공세리(貢稅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는 삼산약수(三山若秀)·강백운(姜白雲)이 있다. 유년기의 기록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10대 후반에 서울로 상경 당시 한국 내 유일한 치과 의술 교육기관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한 것으로 보인다.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재학 중 사적유물론 등에 관심을 가지고 일본의 사회주의자인 야마카와 히토시(山川均)의 저작을 탐독하며 독립의 꿈을 키워나갔다. 학생운동에 뛰어들어 조선학생회를 조직하여 활발히 활동하였다. 1930년 10월 25일 당시 서울 효자동 고학생갈돕회관에서 열린 고학생갈돕회 제20회 정기총회에서는 조선학생회 대표 자격으로 축사를 낭독하였다. 이듬해인 1931년 2월 5일 당시 서울 공평동에서 열린 조선학생회 집행위원회에서도 집행위원장의 자격으로 참여하였다. 여기에서 조선학생회는 학생 교양 운동에 집중하던 이전의 모습을 버리고 일본노농당 등과 제휴하여 정치·경제 등 사회적 방면으로 진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에 따라 이 집행위원회에서는 조선학생회의 조직체를 변경하고 정치적·사회적 방면으로 적극적으로 진출할 것을 결의하였다. 또한 이 집행위원회에서의 결정에 따라 조선학생회는 그해 6월 『조선학생(朝鮮學生)』이라는 기관지의 창간호를 발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공산주의 지도 방침, 민족주의 고조 등에 노력한다’라는 이유로 일제 당국에 의해 6월 17일자로 불허가 처분을 받아 실제로 기관지를 발행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한편, 1930년부터 경성제국대학 각 학년을 중심으로 ‘독서회’라는 명칭의 조직이 만들어졌는데, 그 일환으로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4학년 시절 독서회의 지도부를 이끌었다. 그러던 중 경성제국대학 독서회를 이끌던 신현중(愼弦重) 등이 1931년부터 기존의 독서회를 ‘반제부(反帝部)’로 조직하여 반제국주의 및 반전운동에 주력하게 되자 여기에 동참하였다. 1931년 9월 21일경 당시 남산에 있던 조선신궁 뒷길 문 부근에서 경성제국대학 반제부 소속의 이치카와 아사히코(市川朝彦)와 만나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내에 반제부를 조직해 달라는 제안을 받고 이를 수락한 것이다. 또한 서울 내 각 학교에 조직될 반제부를 통일적으로 지도할 기관으로서 ‘반제(反帝)경성도시학생협의회’를 조직하기로 하고 이치카와 아사히코·박승민(朴勝珉)과 함께 준비위원이 되었다. 그 뒤 학교 동기였던 윤사식(尹思植)·오효선(吳孝善) 등을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반제부에 가입시키는 등 활동을 이어갔다. 각 학교의 ‘반제부’와 ‘반제경성도시학생협의회’에서의 활동은 비밀리에 소수의 동료들과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 1930년대에는 여러 차례에 걸친 공산당 검거 사건의 여파와 조직상의 문제로 조직적이고 합법적인 단체에 의한 활동이 어렵게 되었다. 대부분이 지하조직인 비밀결사에 의존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요 활동 중 하나였던 출판물의 인쇄 및 배포도 역시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1931년 9월 중순경 이치카와 아사히코가 ‘반제경성도시학생협의회’의 기관지로 ‘반제학생신문’을 발행하고자 원안을 작성하였을 때 박승민과 함께 한글로 번역하는 일을 맡았으며, 이를 비밀리에 인쇄하여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학생들에게 배포하였다. 한편, 1931년 9월 19일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킨 것을 비판하고 반전(反戰)과 노동자·농민·학생 등의 단결을 촉구한 반전격(反戰檄)이라는 격문의 배포에도 참여하였다. 이 격문은 경성제국대학의 신현중 등에 의해 작성된 것인, 1931년 9월 27일 오후 7시 30분경 조선신궁 뒷길 문 부근에서 500매를 전달받아 배포할 임무를 받았던 것이다. 이 가운데 200매는 서울의 경신학교 학생 박노섭(朴魯燮)에게, 나머지는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를 비롯한 여러 학교에 배포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격문 뭉치를 받아 돌아가던 도중 당시 서울 욱정(旭町) 2정목(二丁目, 현 회현동 2가) 부근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것이 단서가 되어 서울 내 각 학교의 학생들 40여 명이 검거되었고 반제동맹, 적우회 등의 비밀 조직체가 드러났다. 체포된 후 경찰 취조 끝에 1931년 11월 16일 이른바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기소 의견으로 송치되었다. 이듬해 11월 24일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이후에는 고향으로 내려가서 1934년 1월부터 『동아일보』 아산지국의 인주분국장으로 활동하였으나, 1936년 3월 3일부로 분국장 업무를 그만두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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