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갑
姜永甲1910. 4. 8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김해농민조합
포상 정보
- · 애국장(2018)
관련 사건
- · 김해공립농업학교 만세시위사건
- · 김해적색농조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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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2018) 1910년 4월 8일 경상남도 김해군(金海郡) 김해면(金海面) 북내동(北內洞, 현 김해시 서상동 일대)에서 태어났다. 강대갑(姜大甲)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학창시절 이후에는 김해 동상동(東上洞) 지역에 거주하였다. 김해에서 김해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김해공립농업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 3학년에 재학하던 1930년 2월 4일 아침 조회 시간에 강단으로 뛰어올라 ‘경찰에 구류된 학생의 석방’, 그리고 ‘약소민족 해방 만세’ 등을 외쳤다. 당시에는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여파가 전국 각 학교에 미치고 있었는데 김해공립농업학교에서도 ‘불온격문’이 제작 살포되는 일이 있었다. 이에 호응하여 배기진(裵基鎭)·박기수(朴基秀) 등 김해공립농업학교 학생 몇몇이 시위운동과 동맹휴교를 계획하는 등 움직임이 있었다. 이로 인해 체포되어 구류 상태에 있던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를 고창하였던 것이다. 이 만세 사건으로 체포되어 1주일간의 구류 처분을 받았고 출옥하였지만, 결국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말았다. 그 후 김해청년동맹 및 김해농민조합 청년부에 가입하면서 지역에서의 사회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1930년 4월에는 일제 경찰의 메이데이 예비 검속으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검속되기도 하였다. 특히 두드러진 활동은 김해농민조합 내에서 이루어졌다. 김해농민조합 청년부에서는 김해공립보통학교 동창 노재갑(盧在甲)·허성도(許晟道) 등과 함께 청년부 내에 사회과학연구회라는 일종의 독서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이 조직은 구성원 간에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한편, 농민들에게 사상을 고취하고 농민조합의 확대 강화를 목표로 하였다. 이러한 활동 때문에 1932년 7월 초 김해농민조합 및 청년부 간부들과 함께 검거되었다. 이후 50여 일간의 취조 끝에 노재갑·허성도 등 4명과 함께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고, 1933년 4월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다. 형이 집행 중이던 1934년, 칙령 제19호에 의해 징역 기간이 10개월 24일로 감형되었다. 이에 따라 1934년 3월 18일 만기 출옥하였다. 출옥 뒤에는 함께 검거되어 몇 달의 차이를 두고 비슷한 시기에 만기 출옥한 노재갑·허성도 등과 함께 다시 김해농민조합 재건 활동에 매진하였다. 김해농민조합은 1932년 7월에 있었던 간부진의 대거 검거로 인하여 조직이 와해되어 결국 8월에 해산하였고 농민조합의 재산도 모두 김해체육협회로 넘겨진 상태였다. 출옥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인 1934년 5월경, 일본에 유학하면서 좌익문학 연구 서클에서 활동하다가 김해로 돌아와 있던 김해공립보통학교 출신 송세준(宋世譐)과 만나 이전의 김해농민조합 활동을 돌아보고 실패 이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울러 앞으로의 실천 운동은 혁명적 전위분자(前衛分子)를 양성하고 견실한 운동 기반을 구축한 뒤에 해야 한다는 주장을 피력하였다. 노재갑·허성도 등이 출옥한 뒤인 1934년 말에 접어들어서는 동료들과 함께 더욱 활발한 논의와 활동을 거듭하였다. 특히 검거 이전의 김해농민조합 운동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앞으로의 활동 방향을 정립하는 데 힘을 쏟으며 동료들과의 논쟁도 피하지 않았다. 과거의 김해농민조합 간부들은 대중의 신뢰를 상실하였기 때문에 곧바로 농민조합과 같은 형태의 조직체를 결성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았다. 대신 스스로 연구를 거듭하는 한편으로 농민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운동의 뿌리가 강고하도록 기반을 다지는 것이 우선이라고 보고, 그에 맞는 운동 방침을 정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한 활동의 일환으로 1935년 6월에는 김권태(金權泰)와 함께 김해 읍내에 50여 명의 젊은 여성으로 조직된 김해여자친목회(金海女子親睦會)와 교류하여 진보적 인물들을 획득하고 전위분자로서 지도·교양시킬 것을 기획하였다. 또한 1936년 5월 중순경에는 노재갑 등과 함께 당시 『중앙일보』 김해지국이 주최한 아마추어 연극 공연을 맡아 진행하였다. 이 경험을 통해 대중을 계몽하고 혁명운동에 진입시킬 수 있다고 보고 장래에 일종의 좌익연극연구단을 조직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렇듯 1934년 출옥 이후 약 2년에 걸쳐 운동의 기반을 다지는 활동을 하였다. 그러한 활동들이 이어진 끝에 1936년 6월 하순경에 이르러서는 『동아일보』 김해지국에서 김권태와 만나 그때까지의 활동에 한층 더 노력하는 한편, 그해 안에 농민조합과 같은 조직체를 결성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1936년 9월 동료들과 함께 다시 검거되었다. 이때 함께 검거되고 구속으로 검사국에 송치된 사람은 노재갑·김권태·허성도·송세준을 포함한 총 5명이다. 검사국으로 송치된 후 1938년 1월 31일자로 예심이 종결되고 공판에 회부되었다. 1938년 3월 3일에 있었던 판결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주로 부산 지역에서 좌익 진영의 사회운동에 진력하였다. 1945년 12월 24일 열린 인민당 부산지부 전형위원회에서 선정된 전형위원 75명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렸으며, 조선공산당 부산시당의 주요 인물이기도 하였다. 노동조합 운동에도 투신하여 1945년 12월 발기한 전국노동조합 부산지방평의회의 주요 간부로 활동하였다. 그 활동의 일환으로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 결성대회에도 부산 지역 대표 중 한 명으로 참석하였다. 1947년에는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 경남도평의회의 발족을 위해 조직선전부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이후에는 집행위원으로서 서기국장을 맡았다. 1947년 7월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 경남도위원회에서 미소공동위원회 축하 시민대회를 계획할 때 준비위원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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