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基昌
崔基昌1882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3)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3) 평안남도 양덕군(陽德郡) 온천면(溫泉面) 거차리(巨次里)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919년 당시 38세로, 1882년생으로 추정된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4일 양덕군 양덕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양덕군의 만세시위는 온천면 상청리(上淸里)에 거주하고 있던 천도교 양덕군 교구장 이영화(李永華)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영화는 1919년 2월 하순에 천도교 대교구장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에 들렀다가 독립선언서 100여 장을 가지고 돌아왔다. 귀가 도중 상룡면(上龍面)·하룡면(下龍面)·대구면(大救面)에 들러서 천도교 교인들을 만나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논의하고 양덕군에서 큰 장이 열리는 3월 4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거사일인 3월 4일 새벽 5시를 기해 양덕면(陽德面) 상석리(上石里) 천도교 교구당 앞에서 독립선포식이 거행되었다. 이때 군중과 함께 헌병대와 우편국이 위치한 하석리(下石里) 방면으로 행진을 시작하였다. 오전 9시경, 금융조합 이사가 군중을 질책하자, 시위대가 크게 항의하며 이사를 구타하였다. 이때 일제 헌병이 나타나 갑작스럽게 실탄을 쏘았고, 이에 분노하여 군중과 함께 헌병분견소를 습격하였다. 이날의 시위에서 20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중경상자는 50여 명에 달하였다. 진압 현장에서 일제 헌병에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평양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1919년 6월 17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여 같은 해 8월 28일 고등법원에서 오히려 형이 가중되어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