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萬鍾
崔萬鍾1901. 7. 10 ~ 1972. 4. 22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안성군 원곡면
- · 양성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901년 7월 10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원곡면(元谷面) 외가천리(外加川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최명진(崔明鎭)·최만보(崔萬甫)이다.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4월 1일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양성면(陽城面)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이후 만세운동 소식이 전달되자 원곡면 칠곡리(七谷里)에 거주하는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 내가천리(內加川里)에 거주하는 이덕순(李德順)·최은식(崔殷植), 외가천리(外加川里)에 거주하는 이근수(李根洙)·이희룡(李熙龍) 등은 원곡면 일대에서도 만세시위를 추진하기로 하고 주민들을 독려하였다. 이어서 3월 28일 원곡면 외가천리(外加川里)에 위치한 원곡면사무소에서 만세시위가 시작된 후 4월 2일까지 지속되었다. 평소 조선의 독립을 열망하고 있었으므로 4월 1일 밤 원곡면사무소에서 거행된 만세시위에 합류하였다. 이근수·이덕순·최은식·이유석·홍창섭 등은 1,000여 명에 이르는 시위대를 이끌고 미리 준비한 태극기와 횃불을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만세시위에 참여해 시위대와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양성면으로 이동하였다. 밤 9시 50분경 원곡면 시위대와 함께 양성주재소에 도착하였다. 마침 양성면 시위대가 만세시위를 마치고 자진해서 해산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후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자는 원곡면 시위대의 제안에 양성면 시위대가 합류하면서 시위대의 규모는 2,000여 명으로 확대되었다. 시위대와 함께 양성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양성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졌다. 이때 최관길(崔寬吉)·최은식·이회봉·김중식(金重植)·김순서(金順西)·정인규(鄭寅圭)·이규완(李圭完)·오윤선·오세학(吳世鶴)·고인재(高麟在)·이양섭(李陽燮) 등이 양성주재소로 진입하여 내부의 주재소 집기와 서류 등을 파손하고 주재소에 불을 질렀다. 이어서 김원순·송우필·손원심·강봉세 등과 함께 우편소로 이동해 투석전을 전개하였다. 이때 이운실(李雲實)을 비롯한 시위대 일부는 전신주 3개를 쓰러뜨리고, 전화기를 비롯한 각종 집기를 파손함으로써 양성면 일대의 통신을 두절시키고자 하였다. 또 일부 시위대는 안성면에서 양성면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다리를 파괴해 일제 군경의 추가 투입과 강경진압을 지연시키고자 하였다. 다른 시위대 일부는 양성면에 거주하는 일본인 상인과 대금업자 가옥 등을 공격한 후 방화하였다. 4월 2일 새벽 4시경 시위대와 함께 원곡면으로 돌아와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원곡면사무소를 공격하였고, 일부 참여자는 내부로 들어가 집기를 부수고 숙직실을 방화하였다. 일제는 격렬하게 전개된 안성군 만세시위의 관련자를 조사·색출하기 위해 4월 3일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였다. 이후 조사 과정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한 사실이 밝혀져 안성경찰서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하지만 내란죄 적용 등의 문제를 두고 조사와 공판이 이어졌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내란죄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경성지방법원으로 관할 재판소를 지정받았다. 같은 해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변호사들의 사법 절차 문제 지적 법정투쟁의 결과 공소 불수리 처분을 받았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건조물 소훼, 소요죄 등으로 징역 2년 6월(미결구류일수 중 500일 본형 산입)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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