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明白
崔明白1875. 3. 13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7)
관련 사건
- · 1919년 수안군 수안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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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7) 1875년 3월 13일 황해도 수안군(遂安郡) 대평면(大坪面) 하조리(下鳥里)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3일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 읍내에서 거행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평양(平壤)·안주(安州)·의주(義州)·선천(宣川)·원산(元山)·진남포(鎭南浦)에서 만세운동이 일제히 일어났고, 이후 이러한 소식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천도교 중앙총부는 독립선언서를 각 지역의 천도교구로 전달하였다. 황해도 수안군에는 천도교 중앙총부 월보과장(月報課長) 이종일(李鍾一)의 지시를 받은 곡산군(谷山郡)의 이경섭(李景燮)을 통해 독립선언서가 전달하였다. 3월 1일 저녁 이경섭은 수안면(遂安面) 석교리(石橋里)의 수안천도교구를 방문하여 안봉하(安鳳河)를 비롯한 천도교 인사들과 만난 자리에서 독립선언서 70장을 전달하였다. 그리고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면서 수안군 일대에서도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권유하였다. 3월 2일 안봉하·김영만(金永滿)·나찬홍(羅燦洪)·김형선(金炯宣)·이달하(李達河)·나용일(羅容日)·홍두옥(洪斗玉)·안창식(安昌湜)·홍길재(洪吉載)·이윤식(李潤植)·홍두익(洪斗益)·이영철(李永喆)·이응호(李應浩)·최용식(崔鎔植)·홍석정(洪錫楨)·한청일(韓淸一) 등은 모임을 갖고, 3월 3일 수안 읍내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거행하기로 결의하였다. 하지만 오후 3시경 황해도 경무부장이 독립선언서의 전국적 확산 기도와 이에 따른 수안 천도교구실을 수색하라는 내용을 담은 전보를 수안헌병분대로 보냈다. 일제 헌병들은 이러한 지시에 따라 천도교구실을 급습해 독립선언서를 압수하고 현장에 있던 천도교 인사들을 체포하였다. 이때 일제 헌병에게 체포되지 않은 이영철·홍석정·한청일은 수안군 내 천도교인에게 3월 3월 만세시위 참여를 독려하였다. 3월 3일 오전 6시경 천도교인을 포함한 약 150명의 시위대는 이영철·홍석정·한청일의 주도로 수안헌병분대로 이동해 퇴거를 요구하면서 만세시위를 펼치다가 해산하였다. 오전 11시경 수안헌병분대 앞에 천도교인 등 100여 명이 다시 집결한 후, 이동욱·오관욱의 지휘을 받아 헌병분대의 퇴거를 요구하며 내부 진입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일제 헌병이 총격을 가해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시위대는 다시 해산하였다. 오후 1시경 홍석정·한청일·오관옥 등이 이끄는 15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분대가 설치한 정문의 저지선을 뚫고 내부로 진입하였다. 이어서 김희덕·이치제·오병선·양석두 등은 독립을 외치면서 헌병분대의 퇴거를 강경하게 요구하였다. 그러자 일제 헌병이 다시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시작하였고, 10여 명의 사망자와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또한 일제는 3월 4일부터 수안군에 일본군 병력을 파견하여 만세시위의 확산을 차단한 후, 참여자를 색출하였다. 이 과정에서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지만, 내란죄 적용 문제를 두고 오랜 조사와 공판이 이어졌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내란죄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경성지방법원으로 관할 재판소를 지정받았다. 같은 해 8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변호사들의 사법 절차 문제 지적 법정투쟁의 결과 공소 불수리 처분을 받았다. 그해 1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로 징역 1년 6월(구류일수 중 450일 본형 산입)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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