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秉元
崔秉元1879. 11. 7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2)
관련 사건
- · 1919년 이원군 서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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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2) 1879년 11월 7일 함경남도 이원군(利原郡) 동면(東面) 대화리(大禾里)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10일 이원군 서면(西面) 읍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원군에는 3월 5일 독립선언서와 만세시위 소식이 전해졌다. 3월 7일 이원군 천도교구장 김병준(金秉濬)은 이도재(李道在)·박승룡(朴承龍) 등 15명을 모아 서울의 기독교인 박용해(朴龍海)가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를 회람하였다. 그리고 3월 10일 이원군 서면 읍내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8일 이도재는 이원 천도교구실에서 거사 당일 사람들에게 배포할 독립선언서 약 500장을 인쇄하였다. ‘우리들 조선 민족은 세계의 대세에 따라 민족 자결의 원칙에 의해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2천만 동포에게 경고한다’는 내용의 선언서는 공시우(孔時祐)·김병준·김선태(金璿泰)·박승룡 등 주도인물 15명의 명의로 작성되었다. 3월 10일 이도재·박승룡 등은 남문리 읍내 시장에서 모인 주민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었다. 이 과정에서 김중삼(金仲三)·염처학(廉處學)으로부터 독립선언서 13장을 전달받으면서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권유받았다. 이때 호응하여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오전 11시 30분경 김창렬의 연설이 끝나자, 선두에서 주도인물들이 시위대를 이끌었다. 이러한 만세시위 과정에서 독립선언서 13장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이도재의 주도로 800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대와 함께 읍내에 위치한 이원군청·이원헌병분견소·공립보통학교·이원장터 일대를 행진하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6월 30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해 항소하였지만, 같은 해 8월 1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며 “만세시위는 조선민족으로서 정의 인도에 근거하는 의사행위로서 죄가 아니다”라고 주장하였으나, 그해 10월 25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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