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丙浚
崔丙浚1895. 1. 15 ~ 1945. 5. 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광주군 광주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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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5년 1월 15일 전라남도 광주군(光州郡) 효천면(孝泉面) 양림리(楊林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한자를 달리한 최병준(崔丙俊)을 썼다. 숭일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19년 3월 10일 광주군 광주면(光州郡)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광주면의 만세시위는 김복현(金福鉉) 등이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귀향하면서 준비되기 시작하였다. 김복현은 3월 3일로 예정된 고종 장례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했다가 만세시위에 참여한 후 독립선언서 등의 인쇄물을 가지고 귀향하였다. 그리고 3월 6일경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의 남궁혁(南宮爀)의 집에서 김복현·김강(金剛)·송흥진(宋興眞)·최정두(崔正斗)·한길상(韓吉祥)·김태렬(金泰烈)·강석봉(姜錫奉)·손인식(孫仁植)·김용규(金容奎) 등과 함께 회합하면서 독립선언서 등의 문서를 열람하였다. 이들과 함께 인쇄물을 등사해 장날인 3월 8일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한 후, 연락과 인원 동원 등의 역할을 분담하였다. 이때 숭일학교 교사로서 학생들의 거사 참여를 유도하는 역할을 맡기로 하였다. 하지만 만세시위를 준비하면서 시간이 부족해지자 광주의 작은 장날인 3월 10일로 거사일이 변경되었다. 만세시위가 3월 10일에 전개될 것이라고 김강에게 미리 전해 들었다. 거사 전날인 3월 9일 밤 수피아여학교 부근의 교회와 양림리 기념각에서 수피아여학교와 숭일학교 학생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온몸을 희생하여 자유를 위해 힘썼듯이 우리도 어떠한 장해라도 배제하고 그 목적을 관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권유하였다. 한편, 3월 8일과 9일에 최한영(崔漢泳) 등이 등사한 독립선언서와 경고문 등 여러 인쇄물 수천 장을 집으로 가지고 왔다. 이 인쇄물 가운데 일부를 숭일학교 생도 20여 명에게 나누어주고, 거사일에 광주의 각 관청과 만세시위 참여자들에게 배부하도록 지시하였다. 3월 10일 오전에 숭일학교 보통과·고등과 학년 대표인 정두범(鄭斗凡)·김철주(金鐵柱)·김성민(金聖敏)·김판철(金判哲)·김정수(金楨洙) 외 1명을 불러 선언서 등 인쇄물 1,000장을 나누어 주면서 학생들과 만세시위 참여자들에게 배부하도록 하였다. 만세시위 시작 시간인 오후 2시 30분이 되자, 부동교 아래에 1,000여 명이 모여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시위대의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내 일대를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우편국 앞까지 행진하자 일제는 기마 헌병대·소방대·재향군인회 소속 회원들까지 모두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강제적으로 진압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100여 명이 체포되면서 시위대는 오후 5시경 해산하였다. 이때 일제 헌병에게 붙잡혀 조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6월 1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며 항소하였고, 같은 해 9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며 다시 징역 3년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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