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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先云

崔先云

1884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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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崔先云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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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벽동(碧潼)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북도 벽동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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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2)

관련 사건

  • · 1919년 벽동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12) 평안북도 벽동군(碧潼郡) 우시면(雩時面) 우상동(雩上洞)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884년생으로 추정된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4월 1일 벽동군 읍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평북 지역의 만세운동은 3월 1일 의주(義州)에서 유여대(劉如大) 목사의 주도 하에 일어난 이래, 전역으로 점차 퍼져 가고 있었다. 벽동군에서도 이미 3월 10일에 한 차례 만세시위가 있었는데, 3월 31일을 전후하여 다시금 또 한 차례의 만세시위가 계획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3월 27일 지인인 공예수(公禮洙)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때 ‘세계가 민족자결주의에 의해 영토를 분립할 것이며, 조선도 역시 독립될 것’이라고 하는 공예수의 이야기를 듣고는 만세시위는 조선 민족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참여하기로 결심하였다. 3월 30일, 31일에 잇따라 벽동군 읍내에서 천도교도 200여 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불렀고, 4월 1일에는 벽동군 읍내 장날을 맞아 800여 명이 모여든 가운데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이에 호응하여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시위대는 읍내 남문(南門)은 물론, 인근 산 위에까지 올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으며, 일제는 연이어 시위가 발생하고 그 규모가 커지자 일본군 보병 26명을 대거 투입하여 진압을 시도하였다. 시위대가 쉽사리 해산하지 않자, 비무장한 시위대를 대상으로 발포, 최대 11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최소 13명에서 최대 25명을 검거하였다. 이때 경관에게 붙잡혀 취조를 받고 15일간 구류되었다가 재판에 넘겨졌다. 평양지방법원 신의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19년 6월 2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을 받았다. ‘조선이 독립하는 사실을 신문 상에서 봤을 뿐만 아니라 조선 민족의 의무로 조선독립만세를 부른 것’이라며 상고하였으나, 그해 7월 10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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