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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承福

崔承福

1899. 2. 6 ~ 1919.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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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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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대전(大田)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대전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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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1919년 대전군 유성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899년 2월 6일 충청남도 대전군(大田郡) 유성면(儒城面) 지족리(智足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6일부터 4월 1일까지 대전군 유성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유성 만세운동은 같은 마을인 지족리에서 지족서당(智足書堂)을 운영하던 이상수(李祥秀)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이상수는 2월 말경 천도교 최린(崔麟)을 통해 독립운동에 관한 연락을 받았다. 이에 족제(族弟)인 이권수(李權秀)를 서울로 보내 독립선언서와 『국민회보』를 받아오게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3월 15일 군중에게 나누어 줄 태극기 17장을 만들었고, 조선의 독립을 강조하기 위한 큰 깃발도 제작하였다. 만세시위는 유성 장날인 3월 16일부터 전개되었다. 사전에 첩보를 입수한 일제 헌병 8명이 경계망을 폈지만, 이권수는 깃발을 마을 가장 높은 곳에 미리 게양해 두었다. 다음 날 시장에 나온 이상수는 군중에게 “조선은 이번 독립하여 참으로 기쁜 일이니 이제부터 여러분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자”라는 취지로 연설하였다. 그리고 300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조선의 독립을 알렸다. 만세시위가 점차 격렬해지는 과정에도 참여하였다. 3월 31일 유성시장에서 2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일제 헌병의 억압으로 시위가 강경해졌고, 돌을 던지는 투석전도 감행하였다. 이때 일제의 무자비한 발포로 4명의 주민이 상처를 입었다. 4월 1일 또다시 전개된 시위에도 참여하였다. 이번에는 낫(鎌)과 가래(鍬)를 들고 70여 명의 군중과 함께 시장에 집결하였다.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돌을 던지면서 유성에 있는 헌병주재소로 돌진하였다. 일제 헌병은 시위대를 향하여 무차별 발포하였다. 결국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끌고 만세시위를 펼치다가 총에 맞아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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